주님께서는 마 11:6와 눅 7:23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다. 3절 ‘예수를 배척한지라’의 원어는 ‘(그들은) 그 분 안에서 실족되어왔다 (미완료 수동태)’의 의미다. 보통 ‘실족하다 (스칸달리조)’는 죄를 짓는 것과 연관되는데, 주님의 고향에 오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고향’으로 번역된 단어는 ‘파트리다 (아버지의)’인데, 보통 고향을 ‘모국’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아버지집’ 혹은 ‘아버지의 땅’으로 말한다. 3절에 요셉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는 주님의 육적 아비였던 그는 이미 죽은 것 같은데, 그래서 주님께서 성장했던 마을로 돌아온 것은 그의 육신의 아비인 요셉의 땅이 아니라, 원래 ‘아버지’ 즉 하나님의 땅이다. 하지만 요 1:11에 ‘자기 땅에 (원어에는 ‘땅’은 없음) 오매 자기 백성이 (백성이라는 말도 없음)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되어 있는 것 처럼, 주님의 혹은 아버지의 소유인 땅과 백성에게 왔지만 그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주님을 인해 실족했다.
그들이 주님을 배척한 이유는 간단하다. 주님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고, 주님은 물론 그의 동생들의 성장을 모두 옆에서 지켜봐 왔는데 어떻게 주님이 선지자가 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사실 이해는 된다. 예를 들어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오래 살면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던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주님께서는 그 성장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금식하시기 까지는 평범한 삶을 사셨던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주님을 인해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자라온 형제 중 하나가 목회자가 된다거나 혹은 가족이나 친지 중에 주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들의 성장 과정을 다 봐왔을지라도 그러한 부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당하신 배척을 기억하며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은 우선은 하나님께서만 온다. 그에 대한 인정이나 인증은 사람들 특히 믿음의 형제들이 부여할 수 있지만 (마 11:19, 행 6:3, 롬 14:18, 고후 8:1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의 인증은 헛것이다 (고후 10:18).
6절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고 하는데, ‘이상히 여기다 (헬 따우마조)’는 ‘놀라다, 신기하게 여기다’ 등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따우마조’ 하셨던 때는 마 8:10과 눅 7:9의 백부장의 믿음을 보셨을 때와 여기 이들 믿음이 없는 것을 보셨을 때 단지 둘 뿐이다. 하나는 이방인의 믿음에 놀라시고 또 하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들에게서는 전혀 믿음을 찾지 못했던 지금의 경우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정말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 주님께서 만일 지금 찾아 오신다면 판가름 날 것이다. (예를 들어 병은 무조건 하나님이 고치시기 때문에 병원에 가면 안된다 라고 말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지 않으신다 혹은 치유 사역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 역시 큰 문제다)
7절은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라고 했는데, ‘더러운 귀신’은 원어로 ‘부정한 영들’이며, 이들에 ‘대한 권위 (엑수시아)’를 주셨다. 다시 말하지만 영적 싸움은 권위의 문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권위를 주시는 유일하신 분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이러한 권위가 분명히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것들이 필요 없었는데, 제자들은 사역이라는 것이 우선은 주님 주시는 어떠한 것이 먼저임을 배웠다. 그 후에는 전대 있는 자는 갖고 배낭도 그렇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 수 있는데 (눅 22:36), 그것들을 계속 갖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앞 절 22:35절의 경험으로 아무 때든 주님이 내려 놓으라 하실 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정말 믿는 사람, 신자되기 원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또한 나를 보내심을 믿기 원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권위나 인증을 우선하지 않고 먼저 주님께서 주신 권위를 믿고 소유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께서 마음껏 사용하시고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페북 나눔: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시고 또한 세상으로 보내신 것을 믿는 것이 사역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그의 땅에 왔지만 아무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실족당했습니다.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는데 (6절) 이 ‘따우마조 (헬)’는 주님에 대해서 백부장의 믿음과 더불어 여기만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이 하나님과 그 권위를 인정합니다. 주님은 ‘부정한 영들’에 ‘대한 권위 (엑수시아)’를 주셨고, 이는 그리스도의 영적 권위 즉 주님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마 6: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