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주님께서 직접 해석하신 것을 (34절) 마가가 기록했었더라면 너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낳게 한다. 우선 겨자 혹은 겨자씨라는 말을 구약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아마도 구약시대 말 페르시아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동방에서 전해온 식물로 보인다. 헬라어 ‘시나피’는 그 어원이 ‘시노마이 (아프다, 찌르다)’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약에서는 겨자씨 비유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마 17:20, 눅 17:6)’에만 언급된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그 작은 사이즈에 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겨자씨 비유에서는 그 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에 비해 믿음에 대해서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겨자씨 비유에 대해 누룩과 같이 ‘천국의 확장’으로 해석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의견이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왜 하필이면 겨자씨인가라는 점이 첫째다. 단지 작은 사이즈의 씨에서 큰 나무가 된다는 의미라면 겨자씨 보다는 약간 크지만 더욱 더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인용하셨을 수도 있다. 겨자씨의 어원이 위의 ‘시노마이’라면, 그 겨자씨를 심은 목적도 역시 비슷할 것인데, 주님께서는 마 10:34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도 말씀하셨다. 즉 ‘하늘 왕국’의 분명 평안도 있지만 또 다른 면은 ‘분쟁’ 즉 서로 찌르고 갈릴 것이라는 점이다. ‘거룩’의 의미가 ‘구분’이라면, 거룩과 평안을 위해서는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둘째 이유는 바로 위 4절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동일하게 기록된 ‘공중의 새들 (원어 하늘들의 새들)’이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새들이 단지 씨를 먹어버리지만, 여기는 아예 그 가지에 둥지를 튼다. 이것은 심각한 것인데, 과연 겨자씨를 심은 이가 그 목적을 공중의 새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심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이 부분이 없었더라면 ‘확장’ 혹은 ‘성장’으로만 해석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포함시키셨다.
셋째 이유는 이 겨자에 대해서는 열매가 언급되지 않은 것인데, 원래는 ‘풀 (32절)’이지만 나중에는 비정상적으로 ‘나무’가 되어 버린다 (눅 13:19). 주님께서는 눅 6:44에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겨자씨’를 ‘심은’ 것에는 그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마 13:25)’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마지막 이유는 ‘자라다 (헬 아나바이노)’로 번역된 단어에 있는데, 이 동일한 말이 7절 ‘가시가 자라’에서도 쓰였고, 8절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킹제임스역)’ 에서도 쓰였다. 그 원 의미는 ‘위로 오르다’인데, 그래서 식물로 보면 ‘싹을 내다’를 뜻한다. 중요한 점은 7절 가시와 32절 겨자씨의 경우 ‘싹을 내는’ 것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단어인 8절의 ‘자라다 (헬 아욱사노)’가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32절은 ‘심긴 후에는 움을 터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단어는 8절에서 나온 ‘씨’는 물론이고 골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에서도 쓰인,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말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비유임을 말씀하는데, 현재 기독교의 많은 부정적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며 성도들의 교제를 위해 모이기에 힘쓰는 것 보다 사업을 위해 혹은 인간적인 네트워크나 사교를 목적으로 ‘온갖 잡새들’이 날아들고 둥지를 튼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이미 주님께서는 마 11:6와 눅 7:23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라고 예상했던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도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것에 대해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 제 안에 심겨진 것이 덩치만 커지고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겨자씨가 아니라 아가페를 내는 주님의 생명임을 믿습니다. 세상에서는 소망을 아예 찾을 수 없지만, 저 자신은 물론이고 이 땅의 기독교가 보이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오늘도 성령께서 이끌어 주옵소서.
페북 나눔:
겨자씨 비유는 ‘성장’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라다 (헬 아욱사노)’라는 동사가 빠져있고 단지 ‘크게 되다’라는 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온갖 잡새들이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 타락한 종교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검을 주러 오’시기도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 10:34). 나 자신이나 현재 기독교의 여러 부정적인 모습을 본다해도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낙담하지 않고 오직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으로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왕국을 살 수 있습니다. (막 4:30-34)
동일한 겨자씨 비유인 마13:32 눅 13:19에는 ‘아욱사노’가 있지만, 그 태와 시제가 다릅니다. 막4:8 에서 뿌려진 생명의 씨는 그 자체가 힘있게 '직설법, 능동태, 현재진행형'으로 자라지만, 마 13:32에서는 ‘가정법, 아오리스트, 수동태’로 되어 있고, 또 눅 13:19는 ‘아오리스트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그 사람의 ‘심은’ 것이 역시 능동태로 되어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