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영단번에 죽으심으로 옛 제사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된 것을 분명히 밝히지만 (히 7:27), 그렇다고 참된 영적 예배가 쉽고 편하기만 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요시야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행 (6절)’했고, 또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12절)’ 했는데, 모세에 의한 옛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 스케줄을 주도하는, 어쩌면 매우 불편한 제도였다. 제사가 복잡하다고 혹은 힘들고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고 원래 모세를 통한 방법대로 그 절차를 따라 정해진 곳에서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뿐더러 하나님을 기만하며 조롱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얼마나 참된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배 (경배, 프로스쿠네오)는 ‘영 안 그리고 진리 (혹은 참 혹은 현실) 안에서 (요 4:23, 24)’ ‘아버지께 (요 4:21, 23)’ 하는 것이다.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육이나 지성이나 감정만이 아닌,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데, 특히 주의 영은 자유케 하고 (고후 3:17) 진리 역시 자유케 하는데 (요 8:32),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요 8:36).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고 말씀하는데,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올 수’ 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사로잡힌 바 (빌 3:12, 딤후 2:26) 되어야 참으로 자유할 수 있고, 그 분께서 주신 생명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그 분께 올 수 있는 것이다.
11절은 ‘유월절 양을 잡으니’ 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유월절(페샄ㅎ)을 잡으니’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수로서 어린양 하나를 의미하는데, 실제로 잡은 제물은 많았을 것이지만, 그 모든 제물은 각자에게 단 하나만으로 존재하고 체험되는 단수의 어린양이다. 이는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 그리스도시다.
18절은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는데 매우 흥미롭다. 과거 다윗의 권력과 솔로몬의 영화를 가지고도 요시야의 때 처럼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시야의 상황은 결코 쉽지 않았던 때였고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을텐데, 그는 먼저 그의 소유 중 많은 부분을 제물로 드리며 본을 보인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계시록 3:8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작은 능력’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적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은’ 능력이지만 충성한 것을 칭찬하신다. 주님은 능력이 크신 분이시고 (시 79:11, 93:4, 신 9:29, 사 63:1, 렘 27:5 등등) 특히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 (고후 4:7)’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라도 충성하면 가장 큰 칭찬이 있을 것이다.
주님은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제사 의식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 앞에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저희들 되지 않기 원합니다. 능력이 심히 크신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의 작은 능력이지만 주 앞에 충성할 수 있음을 봅니다. 주께서 충성된 주의 많은 종들을 세우고 계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