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역에서 '행위 (43번)' '행함 (27번)' 혹은 '일'로 번역된 단어는 대게 헬라어 '에르곤'이다.
구원의 문제에 대해,
원어는 우리 말에 없는 수동태여서 '구원 받다' 혹은 '구원 얻다'가 아니라 '구원되다'가 더 맞는 번역이다. 이것은 소위 '칭의'도 마찬가지여서 영어 justified 즉 '의롭게 되다 혹은 '의로워지다'로 번역될 수 있다. 시제는 대게의 경우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구원은 절대로 '율법의 행위' 혹은 '율법을 행함' 혹은 '율법을 지킴'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데, '에르곤'이 '의롭게 됨'이나 구원의 문제와 결부될 때는 항상 '율법'이 함께 한다. 즉 '율법의 행위'로 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엡 2:8)되어지다 (아오리스트 시제적인 표현).
그런데 구원'된 (혹은 구원되어진 혹은 구원되어지는)' 그리고 성장하는 이에게 있어 '행위'는 반드시 따라온다. 이러한 언급은 야고보서에 물론 많이 발견되지만,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위 두 구절의 '역사'로 번역된 단어는 '행위' 혹은 '행함'으로 번역된 동일한 단어 '에르곤'이다.
그래서 킹제임스흠정역은
살전 1:3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니' 라고, 또
살후 1:11는 '믿음의 일'로 번역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행위'로도 번역될 수 있다.
육체의 행위로 구원되는 것은 절대 아니며, 특히 율법을 지킴으로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가능하고, 구원되어진 이들은 믿음의 행위가 반드시 따라온다. 구원은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은혜로 가능한 (고전 15:10), 시간을 초월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례를 보수로 여기는 목회자는 없어야 할텐데.. 하지만 어디 목회자에게만 해당할까? 나도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여기며 감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