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담에 대한 기록은 그의 삶 만큼이나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25세에 등극하고 16년을 살고 죽는다. 2절은 조금 특이한 뉘앙스가 풍긴다.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라는 부분은 마치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혹시 들어가기를 꺼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행했다 그러나'에서 '그러나' '라크' '그러나, 그래도,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적어도' 등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가 25세에 등극하기 전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이미 나병에 걸려 따로 별궁에 거한지도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을 것이고,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벌을 받는 장소로 각인되었을 수 있고, 이러한 기억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는 부분 역시 마치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말미암아 백성은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 부패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왕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을까? 사실 몇몇 왕들이 '여호와의 전 ()'이나 성전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성소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어도 성전 출입은 허락되었고 여호와를 섬기는 왕이라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왕으로서 요담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의 실패에 대한 기억을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의 삶 가운데 그 어떤 선지자를 통해서라도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성전을 멀리했던 그는 그의 아버지가 성전에 들어가 '분양하려 함'으로 받은 벌 같은 것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참전하게 되고 승리한다. 이것은 연약한 그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은혜다.

 

요담의 등극한 나이와 통치기간은 1절과 8절에 중복되는데, 그의 삶이 매우 짧았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6절은 개정역으로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하는데, 한글 킹제임스는 '그리하여 요담이 막강해졌으니, 이는 그가 주 그의 하나님 앞에서 그의 길들을 준비 하였음이더라'고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대한 사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또 그런 연유로 삶을 일찍 마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에 대한 경외를 평생 배웠다. 아마도 그는 병약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덧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길들을 하나님 앞에 준비할 수 있었다.

 

주님, 솔로몬도 다윗에게는 연약한 아들이었고, 오늘 요담도 그가 병약했을 수 있었음을 엿봅니다. 육신의 아비들에게도 자기 자식들이 연약해 보이겠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주의 자녀된 우리들을 얼마나 아끼실지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경외하기를 배우기 원합니다. 주님은 은혜가 충만하신 구세주시며, 동시에 세상을 심판하실 무서운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제 성전은 우리에게 열렸고 주의 보혈로 담대히 지성소 안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