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절에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어떤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들었던 아마샤지만 이제 15절에 여호와께서 보내신 ‘한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꾸하며 완전히 무시하고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라며 위협까지 한다. 아마샤는 변한걸까? 25장 전반 기록에 의하면 그가 했던 유일한 ‘올바른 일’은 반역한 신하들의 자녀들을 죽이지 않은 것 뿐이다. 그 외에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우상 숭배와 여호와를 시험하려는 속내가 드러난 것 뿐이다.
죄인으로서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변질된다. 사람은 오직 거듭남 즉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또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변화된다. 문제는 중생의 체험 이후에도 우리의 죄된 기질은 우리의 몸이 변화할 때까지는 끈질기게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 일을 해결하는 핵심이 ‘생각’ 즉 생각을 영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육적으로 하는가에 달렸으며 (8장 6절) 또 ‘몸의 행실을 죽’일 (8:13) 것을 명한다.
특히 12:2은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킹제임스흠정역)’고 기록하는데, 이 ‘변화를 받다’는 수동태이며 ‘메타모르뽀오 μεταμορφόω’로 내적인 면 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모습의 변화 (transform)를 의미한다. 소위 ‘변화산’에서 주님의 모습이 변하셨던 것, 그리고 고후 3:18 에 앞으로 우리의 형상이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할 것에 대해 쓰인 단어이다. 내적인 변화는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데, 얼굴 표정과 옷 입는 것은 물론이며 걸음 걸이, 말하는 것 등 모든 외적인 것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변화를 주시는 주체는 고후 3:18 처럼 ‘주의 영’이시고 그 영은 우리에게 영적인 생각을 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도우신다.
주님, 유다 여러 왕들의 모습이 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며 착잡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거듭남으로 주님의 생명이 믿음으로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다. 그 날에는 온전히 변화를 받을 것이지만, 오늘 그 변화를 위해 주의 영이 우리 안에서 더욱 일하시기를 구하며, 우리로 몸의 행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계속 입증하는 하루되기 원합니다.
페북 나눔:
아마샤는 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안에 숨겨진 우상 숭배와 여호와를 시험하려는 속내가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죄인으로서 사람은 결코 변할 수 없고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다만 변질될 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거듭남 즉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또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변화됩니다. 내적인 변화는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데, 얼굴 표정과 옷 입는 것은 물론이며 걸음 걸이, 말하는 것 등 모든 외적인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변화를 주시는 주체는 고후 3:18 처럼 ‘주의 영’이시고 그 영은 우리에게 영적인 생각을 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도우십니다. (대하 25: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