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지어진 후 솔로몬이 올린 기도는 매우 영적이고 구체적이며 또한 현실적이다.  그 내용은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언급하고 용서하심을 구하며 (21), 공의와 (22,23), 안위와 회복 (24,25), 현실의 필요 및 보호 (26-28), 각 개인의 마음의 간구 (29-30), 하늘 왕국 백성으로서의 자태와 삶 (31-33), 전쟁에서의 승리 (34-35), 예언 및 회복에 대한 간구 (36-39), 다시 영적 언약에 대한 주의 상기하심을 부탁드림 (40-42) 등이다.

 

특이한 것은 21사함 (혹은 용서)’에 대해 간구라고 했는데, ‘간구는 기도의 한 종류이다그런데 이 간구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에 대해 구하는 것 보다는 먼저 사함에 대해 구한다주님께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 21:13)’ 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 11:17)’고 칭함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솔로몬은 이 성전에 대해 왕과 백성이 (직접 와서 기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성전을 향하여기도할 때에도 응답하실 것을 구했고, 그 기도의 우선은 용서하심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연상케 하는데, 6:9-13의 내용이 눅 11:2-4 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모두 죄사함에 대한 간구가 있다소위 이 주기도문을 초대교회에서 계속 했을지는 의문인데, 특히 마 6:10 ‘주의 왕국이 임하소서부분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12:28, 11:20)’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왕국에 대해서는 already but not yet 의 개념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함에 대한 기도는 계속 했을텐데,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신약에서 죄사함에 대해서는  과거 혹은 완료 시제로 되어있는 것이 적지 않지만, 사실은 아오리스트 시제가 대부분이다즉 아직도 우리 삶 속에서 이 죄사하심은 계속 경험 되어야 하고, 주님께서도 눅 17:3-4에서 서로간의 죄에 대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아오리스트 시제)’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5:15-16과 요일 1:9 역시 현재 계속되는 죄사함을 기록한다.

 

이러한 용서가 계속 필요한 것은 죄사함 자체가 그 목적이 아님을 보여주는데, 성전의 존재 이유 역시 복을 받거나 전쟁에 승리하는 것 등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혹은 그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6:9-13절까지의 주기도문 바로 후 14-15에 계속해서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 역시 그 이유다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우리 서로간의 용서 혹은 빚을 탕감함은 계속되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먼저 회개함이 우선한다.  ‘회개돌이킴혹은 ‘(성전 혹은 주님을) 향함이 없으면 죄사함 역시 없다.

 

주님, 거룩하신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요..  다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음을 믿고, 주님께서 먼저 용서하심을 통해 우리도 서로 용납하고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기 원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요구됨을 봅니다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소서주 앞에서 인생의 힘을 빼고 단지 무릎꿇는 힘만 있기 원합니다주님께서 원래 원하셨던 그 친밀한 관계까지 우리를 인도하소서.

 

페북 나눔:

 

솔로몬의 기도 중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어떤 면을 봅니다.  솔로몬은 먼저 주의 언약을 언급하고 용서를 구하는데 (21), 성전에 대해 왕과 백성이 (직접 와서 기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성전을 향하여기도할 때 즉 돌이킬 때 (혹은 회개할 때)’ 응답하실 것을 구했고, 그 기도의 우선은 용서하심입니다이미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신약에서 죄사함에 대해서는 과거 혹은 완료 시제로 되어있는 것이 적지 않지만, 사실은 대부분 아오리스트 시제인 이유는 아직도 우리 삶 속에서 이 죄사하심은 계속 경험 되어야 하고, 주님께서도 눅 17:3-4에서 서로간의 죄에 대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아오리스트 시제)’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5:15-16과 요일 1:9 역시 현재 계속되는 죄사함을 기록하는데, 이러한 용서가 계속 필요한 것은 원래는 죄사함 자체가 그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성전의 존재 이유 역시 복을 받거나 전쟁에 승리하는 것 등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혹은 그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6:9-13절까지의 주기도문 바로 후 14-15에 계속해서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 역시 그 이유이고, 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우리 서로간의 용서 혹은 빚을 탕감함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대하 6: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