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썼던 것 처럼 나는 비즈니스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실패 후에는 다른 비즈니스를 다시 시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 BAM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부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BAM은 비즈니스만이 아니라 선교에도 관한 것이고, 지난 글에서와 같이 이 모든 것은 삶의 전반에 걸친 소위 라이프스타일을 포괄하기 때문에 다시 글을 올릴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명령을 하셨는데, 과연 BAM은 주님의 명령일까? 성경을 원어로 보면 (적어도 원어를 풀이한 것을 보면) 우리가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구절들이 사실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거나 전혀 다른 내용일 수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소위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마 28:19-20은 원어로는 시제가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어서 명령보다는 부탁에 가깝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인데, 이 새 ‘계명 (원어ἐντολή)’이라는 말은 ‘명령’이라는 뜻이 분명 있지만 ‘디렉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함’이 명령 보다는 삶의 목적과 기준이며 디렉션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들을 언급하다가 31절에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는데, ‘가장 좋은 길’에 대해 ‘사랑’ 즉 ‘아가페’를 연결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 13:34은 우리 말에는 ‘서로 사랑하라’로 되어 있어서 명령형으로 들리지만, 원어에는 조금 다르다. 그 형태는 요 15:12와도 동일한데, ‘사랑하라’의 원어는 ‘아가파테’로 2인칭 복수에 현재진행형 동사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명령형 imperative’이 아니라 ‘가정형 subjunctive’이다. 즉 ‘하라’로만은 번역할 수 없고 ‘만일 할 수 있다면’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사실 현실에서 이것을 명령으로 받는다면 항상 좌절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아오리스트 시제) 것 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위 설명과 동일한 동사형태)’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다음 35절에 그 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주신다.
35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원어로는 ‘사랑하면’이 아니라 ‘너희 서로 안에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다면 (역시 가정형)’으로 되어있다. 즉 이것은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가페를 소유’하는 문제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인 아가페를 우리 힘만으로는 행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아가페를 소유할 수는 있다.
사랑 ’하라는’ 것에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것 또 하나의 말씀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오직 누가복음 10장에만 나오는 내용인데, 그 비유 바로 앞에는 소위 ‘지상명령’과 더불어 ‘최대계명’으로 불리는 내용이 나온다. 즉 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다. 이 ‘계명’은 조금씩 다른 상황이지만 공관복음 모두에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계명’ 역시 ‘명령’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명령으로 이해하고 또 그러기를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특히 개정역이나 예전 개역한글판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0)’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강령(綱領) 이라는 말을 마치 ‘강한 명령’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국어사전에는 첫번째 정의로 ‘①일을 하여 나가는 데 으뜸 되는 줄거리, 그물의 벼릿줄과 옷의 깃고대로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원어에는 ‘강령’이라는 어려운 말 대신에 ‘κρεμάννυμι’ 즉 ‘달려있다’로 되어있다.
이 ‘달려있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상황을 좀 더 보아야 한다. 눅 10:25은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하는데, 이 율법사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시고 율법사이기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신다. 율법사는 바로 소위 ‘최대 계명’으로 답하는데, 공관복음 모든 곳에서 시제가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나온다. 즉 ‘사랑하라’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2인칭 단수 미래형 You shall) ’로 되어 있다.
이러한 율법사의 겁도 없는 대답에 주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행하라’는 시제가 현재진행형이며 확실한 명령형이다. 이 율법사에게 ‘지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살것이다’라고 하신다. 즉 이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말씀한다.
이에 대해 율법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주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는다 (29절). 즉 ‘내 이웃이 누구인지 말해주면 내가 사랑하겠소’라는 교만한 도전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장황하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아니라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 누구인지 물으신다 (36절). 즉 (사랑의) 목적이나 대상으로의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 ‘이웃’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한다. 율법사는 (더럽게 여기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하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모두 현재진행형 명령)’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것은 누가는 이 내용을 읽고 있는 이들이 혹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까봐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바로 다음에 기록한다. 일(비즈니스)에 분주한 마르다가 정말 중요한 주님과의 교제에 대해 듣는 내용이다.
BAM은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주님의 명령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지킬 능력도 없을 뿐더러, 명령이 아니기에 그러한 생각에서 해방받아야 한다.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누림이다. 주님을 소유함으로 그에게서 힘을 얻어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결과다. 그렇기에 그 방법 또한 주님 외에는 없다. 주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고 일만 함으로 분주했던 이들에게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3)’ 하실거라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