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장 5,9절은 성전이 클 것이라고 기록하지만, 초대형 건물이 지어지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 사이즈 자체는 초라해 보인다. 오히려 왕상 7:2에는 '그가 레바논 나무로 왕궁을 지었으니 길이가 백 규빗이요 너비가 오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으며'라고 기록하며 솔로몬은 자신의 궁궐을 성전보다 더 크게 짓는다. 물론 성전 자체 만의 사이즈를 포함해 그 뜰 등을 합하면 크기는 더 커지고, 당시 건축물로는 작은 사이즈는 아니겠지만, 그 모든 지혜와 권력 그리고 준비된 재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20규빗 너비와 60규빗 길이의 성전을 짓는다. 이것은 그 아버지 다윗이 그에게 준 설계도를 따른 것임이 분명한데, 성전 건축은 내가 그 크기를 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더라도 주어진 설계도를 넘어서면 안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소위 '사족'이 되는 것인데, 이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전은 그 완벽한 규격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하 3:4은 '그 성전 앞에 있는 낭실의 길이가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백이십 규빗이니 안에는 순금으로 입혔으며'라고 기록하는 것인데, '낭실' 혹은 '현관'이라고 번역된 120 규빗 높이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늘 규격으로는 약 55미터쯤 되는데, 성전 길이의 두배가 되는 높이이며, 아마도 모리아 산이라는 이미 높은 위치의 성전을 더욱 잘 보이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토대로 이스라엘 전체의 중심이 성전임을 보여준다.
오늘의 참된 성전인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요 2:21), 또한 주를 믿음으로 성전으로 함께 건축되어 가는 성도들의 모습 (엡 2:22) 역시 이와 같은데, 우리의 성장은 주님의 어떠하심, 즉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 4:13)'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본주의 즉 인간의 어떠함이나 사람의 일은 용납되지 않는데,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그 중점이고, '하나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솔로몬이 받은 바 규격대로 성전을 지은 것 처럼, 오늘날도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규격이다. 이것은 거룩하고 완벽하지만, 세상적인 안목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주님, 솔로몬의 그 영광스러운 성전은 결국 파괴되었고, 헤롯이 그 과시함으로 더욱 크게 지은 성전 역시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지만, 주님이 세우신 주의 온전한 전은 영원함을 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살아계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주님으로 적셔지고 주님을 닮아감으로 함께 주님의 어떠하심에 이르는 노정에 있기 원합니다. 주님을 더 얻는 것에 분투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