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했다. 여기 저기서 ‘잘 살아 보세’라고 한 것은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가난의 의유는 과학 기술의 부재 보다는 분배의 문제 즉 정치적이며 사상적 혹은 가치관적인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한 나라 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그리 열을 냈었나보다. 지금 한국은 잘살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문제에 봉착한 것 같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삶을 포기한다.
당시 가장 지혜로웠고 모든 것을 누린 솔로몬 왕의 고백은 결국 모든 것이 헛되고, 굽어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많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지식과 지혜를 쌓는 것도 별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13절 말씀에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는 대목에서 마치 우리는 바벨론의 신들 혹은 인도의 신들처럼 사람을 귀찮아 하는 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whimsical God (엉뚱하고 변덕스럽고 고약하기도 한) 이라고 하기도 한다. 왜 인간을 만들어서 이 고생하게 하시나?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목적이 계신 분이고, 그 목적과 과정 안에 자신의 죽음까지 계획하신 분이다. 이런 신이 없다.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고전 8:1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라고 말하며 ‘지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빌립보서 3:8 에서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말하면서 같은 ‘지식’이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 ‘지식’은 ‘그노시스’라는 동일어로 일반적인 지식을 나타낸다. 지식은 ‘이해력’을 가지고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지만, 그 지식이 어디를 향했느냐가 문제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교만하게 함으로 다른 이들을 결국 억압하게 되는 지식이 되지만, 그 방향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되면 가장 고상하고 또 다른 이들을 살리며 덕을 세우는 사랑의 지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이고 축적될 때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 고상하고 출중하고 거룩해서 인간에게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고전 1:21)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는 없다. 한글 창제로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열리게 된 것 처럼 이제 정보는 인터넷과 여러 매개체를 통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엡 5:13, 벧후 3:10) 문제는 알게 될 때 나타나는 번뇌 분노 그리고 무기력함에 대한 태도이다. 결국 내가 영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육적인 잣대로 판단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주님, 세상의 문제와 삶의 고뇌에 대해 내 육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배우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축적되어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가 되소서. 지금 내 자신의 어떠함을 보고 지난 삶의 되돌아 보면 소망이 없고 과연 가능할까 라고 의심도 들지만, 그 날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 3:2)”라는 말씀을 의지합니다. 오직 주님 주신 생명을 통해 그리고 고난을 통해 나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