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달 큐티 말씀을 보니 반은 전도서고 그 다음 반은 계시록 첫 부분이다. 이상하고 아쉽게 생각했던 것은 전도서를 다 끝내지 않고 10장까지 밖에 하지 않는다. 전도서의 결론은 그 마지막 두 장 같은데 왜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계시록이 그것을 보충해 준다. (틀렸음. 지움.)
전도서를 읽을 때 마다 나의 사춘기 생각이 난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스포츠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남들과 어울려 놀기는 했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결국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결론은 전도서의 결론과 비슷했다. 삶은 무의미하고 부조리가 만연하며 인생의 답은 결국 죽음이니 부자와 가난한 자의 죽음이 같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런 결론 뒤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처음 하나님과 만남은 기독교 가정의 종교적 배경이었지만, 후에는 소위 ‘개똥철학(^^)’인 사색을 통해서 였기 때문에 ‘인격적’인 만남은 꽤 후였던 것 같다. 이러한 것이 나에게는 핸디캡이었기도 하다.)
사람들의 삶은 보통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의 많은 부분은 쾌락이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려한다. 하지만 돈과 시간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즐기는 것에 한계가 있으면 오히려 계속 즐기려고 하겠지만 솔로몬처럼 모든 것을 가진 이에게는 쾌락의 끝은 허무다. 모든 것을 가져봐야 내가 먹는 것은 하루 세끼 이상 남들 먹는 양의 많아봐야 두 배 이상은 먹을 수 없다. 좋은 환경에서 살아봐야 그 환경에는 늦어도 한달이면 익숙해진다. 더이상 감사와 유쾌한 기분이 없다.
부자들의 삶이 항상 행복할 것 같지만 연구에 의하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그에 대한 감사와 누림은 그것을 과시할 대상이 없으면 한 달이 못 간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100만불짜리 차를 샀을 때 바로 사고 나서야 정말 기분 좋겠지만 그것을 친구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고 다니지 않으면 그 차 자체가 나에게 주는 기쁨은 금방 끝이난다. 무인도에서 나 혼자 왕국을 만들어 산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다. 편하기는 하겠지.
실존주의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위키)” 라고 한다. 내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느낀 것 역시 모든 것은 부정할 수 있지만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힘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면 나를 존재하게 한 이유와 원인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절대자, 신, 하나님의 존재다.
그런데 다시 실존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믿는 이들도 역시 현실을 사는 존재다. 실패도 하고 타락하기 쉬운 존재들이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복과 평안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세상적 육체적 쾌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보아도 족함이 없는 눈을 채우려하고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데자뷰 같다. 신기루 같다. 오직 주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내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으로의 삶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질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원함으로 채워질 때에만 ‘족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주님, 헛된 세상, 헛된 영광, 잠간의 쾌락이 주님보다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존재하는 한 계속 싸워야할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날 때 ‘헛된 삶을 살았습니다’ 라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고 ‘예수 인도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