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결혼 했으면 이방여자들이라도 잘 다스리고 가르쳐서 계속 함께 더불어 살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말씀에는 굳이 ‘버리라’고 까지 한다. 더우기 이들 중에는 아이들까지 있는 이들도 있는데 (44절) 그럴 경우에는 아이들도 함께 버릴까? 그러지 않을 지라도 아이들에게 갑자기 어머니가 없어지는 것은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큰 충격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율법에 따른 결정이지만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11절에서는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했는데 그러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 그것은 끊어 버리지 않는 들은 결론적으로 율법을 범하게 되고 그 결과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 문제가 그토록 심각한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끊어지건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 그 status를 잃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미국 시민권자가 시민권을 박탈당해서 시민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누릴 수 있는 영생을 잃게 되는 문제이다.
이런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는 이방 여자들과의 관계는 단지 '이색적이고 섹시한' 외국 여자들과 사귀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우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함께 가지고 오는 문제이다. 특히 아이들이 그들 밑에서 성장하면서 자연히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지 않고 겉만 유대인이고 속은 이방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끊어진다. 이방 여자들은 드러내고 혹은 은밀히 하나님의 백성인 남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며 의견이 갈리게 한다. 남편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해도 그것을 비웃고 따르지 않는다.
주님께서 이혼을 금한 것의 전제는 유대인 가정에 대해 국한된 것이었다. 즉 간음 외에는 이혼을 금하셨는데, 이 말씀은 유대인 같은 민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 있지만, 이방민족에 대해서는 하나가 더 있다. 고전 7:15에는 믿지 않는 이와 믿는 이가 결혼 했을 경우 될 수 있으면 함께 살아서 모두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을 권유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혼을 허하고 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즉 가정에 화평이 없다면 갈리게 할 수 있다. 믿는 이들이 사는 가정에도 만일 화평이 없다면 현실은 믿지 않는 이들이 사는 것이 된다. 가정에는 평화가 있어야 하고 이것은 믿음 안에서 일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치가 있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복종해야 한다. 성경은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다. (엡 5)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주님께 복종함으로 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문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고 아내도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녀의 불순종은 남편으로 더 사랑하지 않게 만들고 이러한 현상은 계속 부정적인 고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회개이고 이는 우선 가장이 시작해야 할 것이다.
6절 회개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식음도 전폐하고 남의 죄를 나의 죄 처럼 안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한다.
8절 하나님의 뜻에 따른 회개는 강제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 아니, 강제적이지 않으면 아마도 힘들지 모른다.
주님,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방여인들을 내어 쫓게 하소서. 그와 더불어 그 열매인 그들의 자식도 함께 내어쫓게 하소서. 은밀한 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소서. 주님이 빛 비추셔서 내 속에 숨겨진 죄들을 들춰내시고 과감히 그들을 내어 쫓을 수 있는 용기 주소서. 가장으로서 먼저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주소서.
* 15절 번역이 오해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의 지지를 받는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오직 그 일을 반대했다’라고 번역해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