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고 빛도 없는 이들이 느디님이다.  원래 그들은 가나안 땅의 기브온 족속 또는 후에 추가된 가나안 사람들이었지만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후에 나무패고 물깃는 노예로 소속되면서 계속 그런 허드렛일을 하다가 이스라엘의 패망과 함께 바벨론과 바사 여러 지역으로 끌려가서 아마도 비슷한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나 한다.  물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은 느디님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추측도 해 보지만 아무튼 오늘 말씀인 2차 귀환 때에 레위인들과 더불어 그들이 언급된다.

원래 히브리말인 ‘느디님’의 뜻은 ‘바쳐진 이들’ 혹은 ‘주어진 이들’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덤’으로 주어진 이들일 수 있다.  그들 자신이 원래부터 노예로 살기 원했기에 대대로 노예 생활을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말로 보면 ‘님’으로 끝난다.  농담으로 해석하면 ‘느리게 (발을) 디디는 님’들이다.  흠.. ㅎㅎ  노예로서 일하는 스타일은 좀 느릿하고 더딘 모습을 보였겠지만 꾸준하게 일하고 또 오늘 말씀처럼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느리지만 거룩한 땅에 다시 발을 디딪는 사람들이다.

레위인들 중에도 돌아오기 꺼려하는 이들이 많았겠지만 이들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돌아가봐야 다시 노예일이다.  하지만 돌아온 이들 중 성전 일꾼들이 220명이다.  패망 전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수이지만 그래도 많이들도 돌아왔다.  이들이 설득을 통해서 돌아왔던 아니면 강제적으로 돌아왔던 그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행복했다.

느디님의 삶은 육체적으로는 고달팠겠지만 그들은 행복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다.  에스라  2:62에서 제사장 중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부정하게 여겨져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된 이들도 많은 반면 느디님 사람들은 자신들을 알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알았다.  그러한 일들이 세상적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성전에서 섬긴다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수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했다.  그러한 정체성으로 그는 여러가지 고난을 감내해 낼 수 있었다. 

둘째로 이들은 원래 이름없고 빛도 없는 노예지만 모두 ‘지명받’는 영광을 안았다.  오늘 말씀 목록에는 가장 마지막에 나오지만 다른 족장과 그 자손들과 별 차반없이 모두 역사에 이름들이 기록되었다 (본문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생명책에 기록되는 영광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노예면 어떠랴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셋째로 그들은 섬기는 자들을 섬기는 가장 낮은 이들이다.  키르기즈스탄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SOSI 는 Servant Of Servants International의 약자이다.  즉 종들의 종이라는 뜻으로 ‘만군의 주 만왕의 왕’이신 주님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엎드리는 이들이다.  섬기는 레위인들을 섬기는 이들이 바로 느디님 사람들이다.  이렇게 자신을 낯추고 섬기는 이들이 천국에서는 가장 큰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사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행복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희생할 때에도 행복함을 느낀다. (물론 희생만 해야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보람있는 일을 위해 기부하거나 자신의 시간을 써서 봉사해도 행복감을 느낀다.  비단 광고에서 나오는 멋진 해변가나 요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행복은 주어진다.

주님, 오늘 느디님의 삶을 생각하며 주어진 혹은 ‘바쳐진’ 환경과 시간 안에서 자족을 배우기 원합니다.  화려하거나 exciting한 시간들은 아닐지라도 주님 안에서 발견된 저를 발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