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의 비유 중 가시떨기에 대한 말씀에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3:22). 신앙 생활을 할 때 대표적으로 이 두가지 즉 염려와 유혹이 우리의 목적의식을 방해한다. 말에게는 당근과 채찍이 있지만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을 보더라도 원수가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염려와 유혹이다.
오늘 말씀에 성전 재건을 좌절시키려는 대적하는 이들이 사용한 방법도 역시 유혹과 방해 (핍박, 염려)인데 다양한 방법과 자료를 동원해서 방해하며 일손이 하나라도 아쉬운 때에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은 남들과 나누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되어있지만 동시에 5절에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서로 질 짐은 ‘믿는 이들 안’에서 서로 지어야 하는, 나눌 수 있고 나눠야만 하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크기의 짐이다. 이 ‘짐’의 원어는 바레(원형은 βάρος)로서 짐, 무게, 힘든 일 등의 뜻이다. 하지만 5절의 ‘짐’은 φορτίον 이라는 단어로 영어의 portion 의 어원이다. 즉 내가 맡은, 내게 맡겨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짐이다. 이것은 내가 꼭 져야만 하는 나의 짐이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 참조) 우리에게는 짐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만 맡겨진, 주님을 모르는 그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평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그들과 결코 얽힐 수 없는 거룩한 일들이 있다. 이제 은혜 시대에는 성전이 주님의 몸된 교회(건물이 아닌)이기 때문에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관계적인 문제이므로 더욱 조심하고 깊은 주의를 요하게 된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상의 어떤 것과 타협하려고 하는 것은 유혹이고 그것은 교회 안에 누룩이 들어오게 한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하고 오로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없다. 주님께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실 문제이지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안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누룩이 있는지, 혹은 그것이 이제 더 이상 누룩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방해의 문제를 보면 우리가 가만있을 때에는 원수도 바쁘지 않다. 우리가 기도하고 부흥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됨을 목적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 할 때, 세상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 믿는 이들도 (사실 나도 그런 몹쓸 것에 쓰임을 받은 때도 많았던 것 같다) 방해를 한다. 하나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편하다. 아… 분명한 것은 염려할 것이 온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일을 하고 혹은 일을 잘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염려할 것도 없다.
주님, 세상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주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게 하소서. 세상 염려에서 해방받기 위해 주님의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 이러한 두 방패가 오늘 저를 두르시고,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에도 둘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