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복수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아마 그래서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많은가 보다. 그런데 문제는 복수는 내가 받은 아픔보다 더 많이 갚아주고 싶어 하는 것이 상례다. 즉 내 이가 하나 빠졌으면 남의 이는 몇개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은 복수 보다는 평등의 원칙에 있는 법이다.
그런데 원수를 갚는 것 즉 복수하는 것과 심판에 대해 집행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며, 그 심판을 ‘집행’하는 것은 의로운 천사들과 그의 충성된 종들이지만,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 1 특히 신약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직접 복수했으면 마음이 시원했을텐데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원래 신분이 진노의 자녀였기2 때문이다.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이들로서 악한 자들에 대해 우리가 할 것은 주님의 원수갚는 일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3 우리가 직접 복수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지만 후에 심판을 집행하는 것은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직접하게 된다. 원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지만 (창19:1, 13, 왕하 19:35, 마13:41),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벧후2:4) 믿는 이들이 하게 된다.4
오늘 말씀에 왕의 조서에 원수 갚는 날이 선명히 기록되었고, 그 날은 원래 우리가 죽어야 했을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은 아하수에로 왕을 사용하셔서 원수를 갚으신다. 그리고 그 날이 왔을 때 왕이 직접 원수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집행하는 영광을 갖는다.
구약의 여러 사건들은 현재의 시각에서는 매우 잔인하지만, 당시에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히 12:4) 죄와 싸우지 않았는데, 죄를 그냥 놔두면 내가 죽는다. 아.. 죄와의 싸움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의 누림 사이에 항상 부대낌이 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유익함과 덕을 세우는 일을 추구하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에게는 철저하고 남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푸는 자세로 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믿음의 색깔이 외골수가 될 수도 있다… 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의 말씀에 ‘유익’의 뜻은 ‘함께 하는 것’이요, ‘덕을 세우는 것’의 뜻은 oikodomei 즉 집을 세우는 것이다.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나의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고전 9장)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되다. 왜 안될까? 복수를 내가 하려고 해서일까? 오늘 생각해 볼 문제다…
1 (롬 12:19, 개정)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히 10:30, 개정)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2 (엡 2:3, 개정)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3 (계 6:10, 개정)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4 (고전 6:3, 개정)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