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을 배우거나 선교지에 나가보면 실망하는 부분이 가끔 있는데, 그것은 이제 일반적으로 듣고 배우고 있는 교리가 매우 진보 되었고 또 보편화된 동시에 일반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옛날 중세 시대의 일반 백성의 신앙의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알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구원론에서 분명 각 개인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은혜로 구원받음을 얘기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한 나라의 왕이 개종을 하거나 한 집안의 어른이 개종을 하면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이나 신앙 생활 없이도 자동적으로 전 국민이나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도시들이 삽시간에 이슬람화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형태는 21세기를 사는 지금 여러 선교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보통 선교지의 상황은 취약하기 때문에 각 개인의 신앙을 점검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통한 신앙 같은 것은 사실 보살피기 어렵고 다만 주일에 한번 모이는 것도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물어보면 얼토당토 않은 논리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범신교인 힌두교도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면 예수를 단지 또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며 교회 다니는 것 등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매우 단순한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많은 중세시대 사람들은 지옥가야하고 더우기 요즘 논란이 되는 고니시와 이순신의 구원 문제가 야기된다. 이것이 개인적인 구원관의 한계이다. 그리고 구원의 정의도 매우 혼란스럽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죽으시는데 일식 사건이(과학적으로는) 있어서 로마 군인인 백부장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여러 병정들을 거느리고 모든 일을 명령에 따라 주도한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하는 배경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진정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세시간 동안 계속되는 일식과 그리고 지진의 표적 (마 27장) 등의 어떤 기적적인 요소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마 로마 신화에 바탕을 둔 이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았을까? 그는 베드로와 비슷한 고백을 했지만 그의 고백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을 이룰만한 고백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그 후에는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구원할 자를 모두 구원하신다. 돌아보면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교회를 다니고 있고, 어릴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등학교 때 까지도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또 여러 굴곡을 경험했으며, 처음 ‘사영리’를 접하고 소위 ‘영접 기도’를 했을 때에도 제대로 한 것 같지는 않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삶 자체가 구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순신과 고니시의 구원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고니시는 고백은 했겠지만 그의 삶은 종교를 이용하여 악을 행했던 삶이었고, 이순신은 주님을 영접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의 여러 군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복음을 접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은혜로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신다.
주님, 주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내가 누리는 구원임을 믿습니다. 살인마도 회개케하여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왈가왈부하는 어리석은 소리들이 그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은 세세토록 영광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