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종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세족식에 관한 내용은 없고 성찬식의 내용은 있다.  반면에 영적인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요한복음에는 세족식이 있고 성찬식은 빠졌다.  흥미롭다.  하지만 성찬식에 대한 내용이 없는 요한복음 곳곳에는 주님이 참 떡이요 참 음료며,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많다.  요한복음은 또 승천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4복음서 모두가 필요하다. 

보통 개신교에서는 빵을 조각 내어 나누고 포도주를 작은 잔에 준비하여 돌린다.  교회마다 다르지만 한 달에 한번 하는 교회도 있고 일년에 몇번 하지 않는 곳도 있다.  로마카톨릭은 동그란 과자 모양의 떡을 주고 포도주는 사제가 혼자 마신다.  작은 모임에서는 사제가 큰 컵을 준비하고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며 포도주를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거의 매일 미사마다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성경에서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하는 것을 말씀하며 빵과 포도주 둘 다 나눈다.  누가 복음 22:17에서는 주님께서 잔을 ‘너희끼리 나누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보통 ‘살과 피’라고 하지만 ‘떡과 피’라고 하지 않고 ‘떡과 잔’이라고 한다.  물론 그 잔에는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가 있다.  그리고 피는 죄용서 즉 구속의 의미이다.  그런데 ‘잔’이라는 단어는 여기 저기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주님이 죽으시기 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 18:11)’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 (마 20:22)’ 등 여러 곳에서 이 잔은 내 앞에 놓여 내가 결정해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하다.

기름이나 물고기 등 무엇을 담는 ‘그릇’은 대게 ἀγγεῖον  (앙가연) 이란 단어로 항아리 같은 것이며, 또 사도행전 9:15과 고후 4:7의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에서는 그릇 σκεῦος은 ‘도구’로 번역될 수 있고, 또한 무엇을 담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에서 쓰인다. 

그런데 성찬의 ‘잔’이라고 할 때 모두 ποτήριον 라는 단어를 쓴다. 영어의 pottery의 어원이다.  이 단어는 ‘잔’ 혹은 ‘컵’ 혹은 ‘그릇’ 의 뜻이다.  그리고 모두 단수로 쓰인다.  즉 하나의 잔이다.  또 이 잔은 ‘축복의 잔 (고전 10:16)’ 이며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새 언약  (눅 22:20) 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전 11:25)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성찬과 애찬을 구분하는 이들도 있지만, 주님의 의도는 모일 때마다 먹을 때마다 성찬을 하는 것으로 믿는다.  모든 음식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평범한 음식이 ‘축사(감사)’함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가 되어 생명을 준다.  아침에 큐티를 하며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취하지만, 동시에 식사 시간마다 음식에 감사함으로 참된 음식과 음료가 주님임을 기억하며 먹고 마셔야 한다.  어떤 이들은 성경 말씀이 이제 우리에게 있으니 성찬은 필요없고 말씀만 나누면 된다고 하는데 그런 분들은 말씀이나 제대로 좀 읽으면 좋겠다.  ㅎㅎ

하나인 떡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며,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고 그 잔은 우리를 축복하는 새로운 언약이다. 즉 떡과 잔에도 하나님 나라를 보며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확장되고 하나되게 하는 실체이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살과 피를 우리가 취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우리를 한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새로운 언약이다.

주님,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집에 모여 서로 떡을 떼는 그러한 부흥이 오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고 주님의 영으로 하나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