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아니, 많다. 그런데 이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고 있고, 그러한 태도에 대해 바꾸려는 의지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진정한 회개가 없다. 아직도 하나님 보다는 자기 중심적이다. 즉 육적이고 (carnal) 명목적인 (nominal)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이 앞에 항상 계셔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오늘 그 대표적인 인물로 가룟출신의 유다를 본다. 그는 12제자 중 한명이었고, 주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막 3:14) 불구하고 결국 주님을 팔게된다. 요한복음에는 향유를 붓는 여자를 꾸짖는 이도 가룟 유다였음을 말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그는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목적에 대해 순전하지 못했다. 애국 애족이라는 허울 뿐인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영향력을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주님이 자신이 바라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것을 알게되자 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생각해보니 나도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이 떨어지고 분을 낼 때는 내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배반했다는 오해가 들 때였다. 이만큼 했으면 이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숨겨진 어리석은 바람이 나오는 때이다.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주님을 따랐다. 마치 요즘 번영신학이나 그 외 다른 목적으로 교회다니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주님을 위해 뭔가 했다고 했는데 그만큼 혜택이나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있다. 그의 가진 모든 것, 여자로서의 모든 것, 그리고 조금 부은 것이 아니라 병을 깨뜨리고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향유를 주님께 부은 여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의 헌신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그의 헌신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깨뜨린다. 하나님이 배반하실 수 있는 기회 조차 없는 헌신이다. 단지 주님을 사랑해서 그 비싼 것을 ‘허비’한다. 아,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이다. 세상이 보기엔 쓸데없는 짓을 하게 한다.
이러한 사랑과 헌신에 대해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의 행한 일도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복음을 들었는가? 단지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고 ‘예수 믿으면 좋~습니다’ ‘만사형통합니다!’ 라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있는가? 이러한 가짜 복음이 하나님이 우리를 배반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진짜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히 허비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평생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아니, 많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인듯 싶다. 하지만 하나님은 배반하지 않으신다.
주님, 나의 부끄러운 생각을 회개합니다. 변치 않으시는 주님은 나를 배반하시지 않고 오히려 내가 주님을 얼마나 배반하는지요.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소서. 주의 긍휼의 손으로 나를 만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