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절 ‘많은 사람들’의 원어는 ὄχλος (옥-흘로스, 한국어로 쓸 때 x를 ‘ㅋ’로 쓰지 않고 ‘ㄱㅎ’로 쓰는 것이 본 발음에 더 가까와서 이렇게 씀)로 그 뜻은 ‘무리’ ‘군중’ ‘평민’ 등이다. 마가는 다윗과 그의 자손 그리고 이름 없는 군중들을 대비시키고 또한 바로 뒤에 그들 위에 군림하는 서기관들과 그들에게 가산을 빼앗기는 힘없는 과부를 등장시킨다. 아마도 그래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해방신학이 탄생한 것 같다.
그런데 조금 더 읽어보면 주님은 당시 사회를 다 뜯어고치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억압하니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난한 과부가 그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칭찬하신다.
정말 어려운자들은 물론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헌금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아, 이들에게서 무슨 헌금이 나오려나? 자립하려면 한참 멀었다’라는 생각이 들곤하지만 정말 주님을 만나면 가난한 자들의 물질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드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루 종일 힘겹게 폐지를 모아 몇 만원을 손에 쥐면 그 중에 먼저 십일조를 떼어놓는 노부부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동시에 그 피묻은 돈을 흥청망청 쓰는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물론 몇 몇 목회자들의 이야기지만 오늘 서기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이 과부를 칭찬하면서 앞으로 계속 생활비 모두를 넣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 그럴리는 없다. 다만 그 당시 과부의 결단과 드림에 대해 칭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활비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때 나의 모든 것을 드려야할 때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아쉬운 것이 있는데, 내 첫 월급을 모두 바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여유도 없었지만, 첫 월급을 모두 드리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것을 함으로써 복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돌아보면 감사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신부, 영적으로는 정결한 처녀,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을 끊은 과부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떨 때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을 보면서 ‘무슨 낙으로 사십니까?’ 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옆에서 보면 정말 심심하고 재미없게들 사시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그리 exciting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ㅎㅎ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으로 ‘미망인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몹쓸 단어도 나왔지만, 사실 이 미망인이라는 말이 남이 부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쓰게 되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희망과 낙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다. 즉 남편이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즐거움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믿는 이들의 모습이다. 주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믿는 이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위로 받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위로 받아서도 안된다.
성경에서 과부를 돌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단지 남편이 죽은 여자가 아니라 나이 육십 이상에 신앙의 사람이어야 하며 젊은 사람은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한다 (딤전 5:9-11). 젊은 사람은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과부가 그 구차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주님이 그를 칭찬한 이유는 단지 그의 모든 것을 넣었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 즉 남편을 보내고 이제 하나님만을 그의 남편으로 삼고 의지하고 만족과 위로를 삼음으로 그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었던 그의 믿음이었다.
주님, 물질에 대해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봅니다. 다른 이들을 핑계삼지 말고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 앞에 물질을 놓게 하소서. 주신 것 감사하고 이 가운데 드리게 하소서. 주님으로만 만족과 위로 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