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없다.  단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가야 한다.  이것이 제자도이며 또한 운명론과 예정론의 차이다.  운명론은 어떤 일을 당할 때 운명이나 신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예정론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 뜻 이루심을 믿는 것이다.  그 뜻 안에 내가 포함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기록한 것이 몇 개 있다. 우선 대표적인 것 3개는,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즉 기뻐함, 기도, 감사, 음란을 버림, 선을 위해 고난 받음이다.

그 외에도,

침례를 받음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우리의 간구의 기준이 됨 (롬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율법의 교훈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성령이 우리 위해 간구하심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분별해야 함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영적인 문제에 대해 근심함으로 회개를 이룸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사역자들을 세우심 (골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우리가 알아야 함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인내가 필요함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목회자들은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해야 함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등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4가지 것을 모두 동원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아가파오’ 즉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신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야 하는데, 마음은 헬라어로 καρδία 즉 심장 혹은 마음이고, 목숨은 ψυχή 즉 목숨 혹 혼이고, 뜻은 διάνοια 라는 말로 ‘이해’ ‘감정’ ‘갈망’ ‘생각’ ‘가치관’ 등 많은 의미이며, 힘은 ἰσχύς 라는 말로 ‘재능’ ‘능력’ ‘힘’ 등의 뜻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기관으로 모든 것을 통해 아가페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참으로 큰 짐일 수 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가끔 오락도 해야하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하고…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 삶의 기준이 되기를 원하신다.  마치 욥처럼 성대한 파티를 열고 즐기는 시간이 있어도 다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을 기준과 목적으로 삼는 삶을 사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다시 주님 앞에 무릎꿇고 말씀으로 내 생각과 마음을 씻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 너무 많이 보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둘째는 이것이니’ 라고 번역됐지만, 원문에서는ὅμοιος 라는 단어를 써서 ‘둘째는 이것과 같으니’라고 해서 첫째 계명과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계명이 바로 이웃을 내 자신같이 아가페하는 것이다.  즉 주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가페 한다고 하느냐?  그렇다면 사람을 왜 아가페 하지 않느냐?  서로 아가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교파나 신학의 차이로 같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비방하고 싸우고, 다른 종교인들을 죽이고 이웃을 얕잡아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과연 하나님과 사람들을 아가페 했는가 생각하게 되는데, 엄밀히 보면 그런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 같다.  사실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거룩’이 하나님을 말씀하는 단어듯이 ‘아가파오’ 역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를 ‘성도’ 즉 거룩하다고 부르신 분이 (롬 1:7, 고전 1:2) 우리로 ‘아가파오’하게 하실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에서 ‘같이’ 라는 말은 ὡς 라는 단어로 ‘~처럼, ~같이’ 즉 이웃을 아가페하는데, 내 자신을 아가페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나는 나를 아가페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 무엇도 용서하신 것 같이, 그 어떤 열등감도 받아 주시는 것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며 약함을 용납하고 하나님 안에서 떳떳하고 아가페하는가?  오늘 하나님을 아가페하고 내 주위 사람들을 아가페하고 또 내 자신이 나를 아가페하는지 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 집중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주님, 주님 사랑 더 깨닫게 하소서.  사랑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받은 사랑 큰 것 잊지 않게 하시고, 오늘 더 체험하게 하소서.

•         34절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에서의 ‘지혜’는 보통 쓰인 ‘소피아’ 라는 단어가 아닌 성경에서 유일하게 한 번 쓰인 단어 νουνεχῶς (누넥호스) 라는 말인데, 물론 ‘지혜롭게’ ‘명석하게’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말하는데 있어서 똑부러지게 말했다 혹은 똑똑하게 말했다 라는 뜻이다.  바로 앞절 33절의 지혜는 또 다른 단어로 ‘이해’ ‘명철’ 혹은 ‘지식’ 등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