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는 뭐가 있을까? 답은 '과'? ^^ 오늘 말씀을 보니 성전 청소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 사역하셨을 당시는 아직 성전이 건재했고 주후 70년이 되어야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모두 파괴되니 아직도 주님은 구약에 입각한 경륜을 무시하시지 않고 그 안에서 사역했으며 그래서 십일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마 23:23) 하지만 주님은 13 장에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고 그 자신이 참된 성전임을 보여주셨다.
오늘 말씀이 좀 힘든 이유는 그 시간적인 전개가 마태복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의 기록은 호산나 사건 이후 바로 성전 청소 그리고 그 다음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서 그 즉시 나무가 말라 죽었는데, 오늘 마가복음의 기록은 호산나 사건 후 베다니로 가셨다가 올라 오시는 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그 후에 성전 청소, 그리고 그 다음에 무화과 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후에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은 마태 마가 모두 동일하다.
이러한 시간적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태가 틀리지 않았다면 마가가 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도무지 둘 다 맞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차이를 보일까? 마태복음은 왕이신 구주를 기록한 것에 비해 마가복음은 노예의 모습으로 오신 구주를 기록했다. 마태복음은 그래서 무화과 나무 사건을 굳이 이스라엘에 비유할 필요없이 그 '믿음'으로 생명과 사망을 주장하시는 왕이신 주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단어가 오늘 말씀에는 나오는데 바로 '무화과 나무의 때'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믿음'에 대한 면보다 '때'에 대한 면을 말씀하신다.
왠지 모르지만 이 구절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아직'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게 된다. 즉 13절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고 읽게 되는데, 사실 '아직'이라는 말은 없다. 단지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가 원어이다. 그러면 '아직'이라는 말을 넣을 수도 있고 '이미'라는 말을 넣을 수도 있다. 즉 '이미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지났기) 때문이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성전 청소와 후의 성전 파괴의 예언이 이해가 된다. 즉 이스라엘을 뜻하는 무화과 나무의 때가 이미 지났고 이제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으로 새시대를 열어서 유대인만이 아닌 '만민'에게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새로운 신약 경륜이 시작됨을 말한다.
주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신 후 사람들은 다시는 성전에서 전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 이튿날부터 다시 비즈니스?를 재개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다음 장에는 주님께서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다. 이제 구약의 경륜은 끝났다. 성전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되고 우리가 밟는 땅이 모두 성지되게 하셔서 우리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신 신약의 경륜을 누릴 수 있는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 곧 지금이다.
주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대신에 구약으로 돌아가려는 실수도 합니다. 주께서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을 버리고 모형에 불과한 구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