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얘기는 주님을 태운 나귀 새끼가 사람들이 ‘호산나’로 칭송하자 자기에게 하는 줄 알고 우쭐했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아마도 주님께 쓰임 받는 영광을 마치 자신이 훌륭해서 그렇다고 믿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귀 새끼는 그렇게 훌륭한 탈 것이 못된다. 힘도 없을 뿐더러 더우기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주님도 나귀도 호흡을 맞추느라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다.
제자들이 힘을 합해 돈을 모았다면 멋진 준마 한 마리를 잠시 렌트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어떻게 보면 궁색한 모습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 아니라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슥 9:9).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예언을 이루신 것이고, 나귀의 입장에서 보면 주가 쓰신 것이다 (3절).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라 순종했지만 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아니, 드디어 예루살렘 입성인데 좀 폼나게 들어가시지…’
교회에서 ‘쓰임 받는’ 사람들은 나귀 새끼인가 아니면 준마들인가? 아무리 빨리 달리는 멋진 준마라고 주님은 쓰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은 속도전이 아니라 주님과 호흡을 맞추는 ‘동행’ 혹은 ‘좇음’이기 때문이다. 빨리 달리다 오히려 주위 사람들를 다치게 할 수 있다. 또한 나귀라고 해도 사람들이 이미 타본, 즉 그 마음과 열정이 순수하지 않다면 주님은 쓰시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도 다른 것에 쓰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택하신다.
나는 나귀 새끼인가? 오늘은 미국에 온지 29년 되는 날이다. 어젯밤 다시 29-30년 전 쓴 일기를 보았다. 그때의 순수했던 열정들 꿈들… 그때는 나귀 새끼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계시록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