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의 아버지 이름은 ‘디매오’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람어 ‘타메’를 헬라어화한 것으로 아람어의 뜻은 ‘더럽다’ ‘불순하다’의 뜻이다. 아들이 소경이라 그런 이름을 갖게 된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슬픈 이름이 헬라어화되자 뜻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예를 들어 우리말 이름 ‘영만’이 영어로 되면 young man 즉 젊은 이가 되듯, 이 ‘타메’라는 이름이 ‘디매오’가 되자 ‘큰 상을 받은’ 뜻으로 바뀐다.
소경은 볼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된다. 매일 가는 길은 지팡이를 짚어 갈 수 있지만 그 외의 것은 남의 도움없이 할 수 없다. 중2 때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장님 한 분이 버스를 기다렸다. 집에서 정류장까지는 지팡이를 짚어 올 수 있지만 문제는 버스 넘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날 때면 내가 탈 버스가 오기 전에는 버스 넘버를 말해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요한복음 9:39-40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라고 기록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이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소경이 자신의 눈먼 것을 받아들이고 살듯이, 그냥 자신들의 죄를 당연히 여기고 산 것 같다.
내가 영적인 소경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런데 소경이라도 귀머거리만 아니라면 희망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계시록 일곱교회에 주님이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다. 왜 ‘보라’하시지 않고 ‘들으라’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듣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일 것 같다. 오늘 바디매오도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47절)’ 주님을 소리질러 불렀다. 전 재산인 겉옷을 내던지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니 주님은 그를 고쳐 주셨다. 눈을 떴다. 구원받았다. 그리고 이 ‘더러움의 아들’ ‘바-디매오’가 ‘큰 상을 받은 아들’로 변화되어 주님을 따른다.
주님, 쳇바퀴처럼 반복하는 일상은 내가 소경같이 제한적인 삶을 산다는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 보다 더 나은, 정상적인 것을 위해 던지게 하소서.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