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자신을 종종 ‘인자’라고 3인칭으로 표현하셨다.  구약을 보면 ‘인자’라는 말이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됐지만 오실 메시야를 의미하기도 했다.  주님은 창세기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보다는 겸손히 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말을 즐겨 쓰셨다.  개인적으로 ‘여자의 후손’은 특별한 한 분 즉 구원자와 그의 구속사를 부각시키는 말이지만 ‘인자’라는 호칭은 부족한 나 자신도 포함하여 그 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그리고 영원하심 조차 ‘인자’인 나의 것으로 만드시는 말로 다가온다.

그런데 주님은 44절에 제자들은 모두의 종 (둘로스, 노예)가 되어야 하며, 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종’의 헬라어 ‘둘로스’는 ‘노예’ 혹은 ‘종’ 의 뜻으로 사실은 자신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종은 항상 ‘섬긴다’. 

그런데 주님은 정말 섬기셨나?  어떤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을까?  사실 주님이 섬기셨던 것 중에 생각나는 것은 죽으시기 전 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섬김’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διακονέω 라는 단어인데, 영어 집사를 뜻하는 단어인 ‘디콘’의 어원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섬기다’ ‘종이 되다’라는 뜻이 강하지만 동시에 ‘상에서 음식을 차리고 수종들다’ 즉 ‘먹는 것’에 대한 의미도 상당히 강하다.  즉 섬긴다는 뜻은 특히 음식이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은 생명이었다 (요 6:63).  또한 그 분의 살은 생명의 떡이다.  주님은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고 동시에 참된 양식과 음료가 되심으로 (요 6:55) 우리를 섬기셨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이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다.  골로새서 3:16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고 말씀하며, 참된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하여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하신다.  즉 우리는 이제 서로 섬기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위해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신학을 한 목회자나 혹은 장로 외에 집사 혹은 '평신도'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고 성경적일까?  사실 집사를 세운 목적은 허드렛일 즉 공궤를 주로 맡기 위함이었지만 그들은 사실 말씀도 나누었다.  예를 들어 빌립은 집사 중 하나였지만, 당시 강국이었던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빌립을 보내셨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4영리’ 하나 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정도를 상대하려면 베드로급을 보냈어야 했지만 성령께서는 집사인 빌립을 보내셨다.  그리고 내시가 여려워하던 구약의 말씀을 해석하게 하셨다.

일곱 집사를 뽑는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행 6:3)” 이었다.  그래서 빌립도 가르치며 섬겼다.  스테반 역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성경에 해박했다.  그가 선교 직전에 한 설교는 지금도 우리를 ‘섬긴다’.  보통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라고 하고,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라고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서로 피차 가르치며’ 은사를 받은대로 ‘목자-교사’의 일을 한다.

중국의 농촌 지하교회는 (아마도 농한기에) 매일 모여 하루종일 예배를 하고 말씀을 배운다.  믿지 않는 이들은 농한기에 놀음도 하고 소일거리도 하겠지만 지하교회는 서로 가르치며 말씀과 생명이 풍성히 거하게 한다.

‘사역’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ministry인데, 이 역시 ‘섬긴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40일 금식 후 천사들이 ‘minister’했다.  우리의 사역은 단순히 여러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서로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말씀으로 서로에게 공급하는 것이 참된 사역이요 섬김이다.

주님, ‘집사’라는 호칭이 너무 흔해서 별로 호감이 가지 않지만, 그 참된 의미를 알 때 내가 과연 집사라고 불릴 자격이나 있나 생각해봅니다.  주님, 집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참으로 섬길 수 있도록 거룩한 부담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