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은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 처럼 보인다. 사람을 가려가면서 요구를 하셔야지 부자 청년 (마19:20)에게 그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그냥 따르는게 아니라 십자가까지 지고 (원어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있음) 따라야 한다니… 요즘 이런 요구를 하는 교회가 있다면 아마도 이단으로 몰릴 것 이다. (물론 초대교회 이후 사유재산을 모두 교회로 바치는 것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성경은 더 이상 말씀하지도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 청년 꽤 괜찮은 사람같다. 소위 ‘차도남’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며 교양도 있고 예의 바르고 영적인 관심도 있다. 부족한 것 없는 그에게 단 하나 남은 관심은 영생이고 그 영생을 얻는 방법을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고 있다. (‘선한’의 원어는G18 ἀγαθός (아가또스) 인데 ‘좋다, 착하다, 즐겁다, 행복하다’ 등의 뜻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 특히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무서운 분 같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사역에 임하실 때 모습 중에는 화를 내시거나 거만하게 보일 수 있는 때도 있지만 이 부자청년의 말을 들으면 주님은 평소에는 온화하고 인자하신 모습이셨던 것 같다.)
그는 달려 나와 촌사람 예수 앞에 꿇어앉아 묻는다. 착하다. 그리고 영원한 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다. 사실 단지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영적 갈망이 있는 듯 하다. 십계명도 다 지켰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예수께서 ‘사랑하사 (원어 아가페 21절)’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대답은 그에게 큰 근심을 안겨주었다… (영어로는 the answer took his breath away 라고나 할까)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가 이제 100년이 넘어 부흥을 거쳐 쇄락을 보이는 한국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 임박한 문제이다. 어려서부터 믿음의 부모에게 기독교적 영향을 받아 교회 잘 다니고 ‘믿음 생활’ 잘 해온 착한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무리한 요구… 일까?
그러한 요구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부자 청년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언뜻보면 단 한 가지,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 같지만 사실 좀 더 생각해보면 두 가지 문제가 더 있다. 그가 질문한 것은 영생이었는데,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과연 영원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영생인가? 또한 이제까지 편안한 삶을 버리고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런데 여기에 대해 부자 청년은 더이상 질문하기를 멈추고 근심하며 떠나간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유효 기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이고, 다 버린다고 거지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과 가족과 땅을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
그런데 정말일까? 베드로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베드로가 정말 집과 가족과 땅을 백배나 받았을까? 사적인 재산으로 이해한다면 주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개인적인 재산을 불린적이 없다. 오히려 ‘은관 금은 내게 없(행 3:6)’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 (23, 24, 25절)’에 대한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박해가 따른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짐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 개인적인 삶도 물론 부끄럽지만)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오해 때문이 아닐까? 사유재산이 불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서 주님을 따르는 ‘주의 종’들 중 몇 몇은 물질에 대해 자유롭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초대교회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로 가져왔음에도 사도들은 그 재물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고 재정에 관해서는 일곱 집사들에게 전임했다. 여기 ‘힘쓰다’는 원어는 προσκαρτερέω (프로스카ㄹ테레오) 라는 단어로 하나에 집중하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는 한 개인 혹은 몇 사람이 재산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 즉 commonwealth 라는 개념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비슷할 수 있지만, 그러한 정치적은 시도는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소유를 공유할 때 우리는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누릴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요구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부자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기에 곧 영생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소망없는 삶을 끝내고 생명이 풍성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도 아니지만 나는 부자같이 살고 있다… 아, 주여… 과연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