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없이 기도하는 것은 습관이 될 수 있다. 더우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 이름 안에서, 그 인격 안에서) 라고 기도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으면 계속 불신의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이 들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데 나는 물론이고 많은 신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나의 구하는 기도가 과연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주님은 바로바로 역사가 일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말은 마치 바늘로 코끼리 죽이는 방법 셋과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첫째 한번 찌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죽을 때까지 찌른다 (코끼리가 가만있을까?) 셋째 바로 죽기 전에 찌른다. 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세번 간구해서 허락하시지 않자 포기한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깨닫는다…
15절에 왜 무리가 ‘매우 놀’랐을까? 변화산 후 모세처럼 얼굴에 광채가 났을까? 누가복음 9:29는 변화산의 상황을 묘사할 때 주님의 얼굴도 바뀌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주님의 얼굴에서는 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요절 말씀인 23절을 원어로 보고 여러 영어 번역본을 보니 재미있는 것은 여러 번역본에서도 ‘할 수 있다면 이라고?’ 혹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같이 번역이 되었지만, 킹제임스와 뉴킹제임스에서는 ‘네가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어도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즉 주님은 믿음 없음을 꾸짖는 투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믿는 다면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너’와 ‘믿는 이’가 지금은 다를지라도 언젠가 ‘너’가 ‘믿는 이’가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귀신을 꾸짖으시지만 이 불쌍한 이는 꾸짖지 않으시고 믿음의 비밀을 말씀해 주시고 그 능력을 보여주신다. ‘할 수 있다’의 원어는 ‘두나사이’로 능력을 말한다.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못했느냐고 물을 때 29절에 주님은 ‘기도와 금식’이 없으면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원어에는 ‘금식’이 있다. 즉 기도는 금식이고 금식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좀 생각해 보면 기도하는 이유는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다면 왜 기도가 필요한가? 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좋다. 그래야 제대로된 기도가 시작된다.
주님, 나는 부요합니다. 주님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건강보험도 있고 안정적인 직장도 있습니다. 성경지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고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습니다. 신자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