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했던 유명한 말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이라고 말했는데, 유명한 손자병법은 도가에 바탕을 두어 속임수가 난무하는 술수를 가르치는데 비해 유교철학에 바탕을 두어 정공법을 쓰는 오자병법에는 ‘필사즉생 행생즉사 (요행을 바람)’ 라고 비슷한 말이 나온다.
주님이 하신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절)’ 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삶을 영적 전쟁으로 생각한다면 이순신 장군의 말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쓰인 ‘목숨’이라는 단어와, 앞 34절 구절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목숨이라는 단어는 ψυχή (프쉬케)라는 단어로 ‘숨’ ‘목숨’ 혹은 ‘혼’이라는 뜻이다. 즉 목숨이 끊어지면 죽는 인간의 짧은 생명이다. 여기에 비해 믿을 때 선물로 받는 하나님의 생명인 ζωή (조에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다.
34절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단수) 나의 뒤에 오려거든 자기를 (단수, ἑαυτοῦ Strong G1438) 부인하고 (ἀπαρνέομαι, G533) 자기 (αὐτός, G846)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보통 ‘자신’이라는 말은 아우토스 (G846)라는 말을 쓰지만 거기서 변형된 헤아우투 (G1438)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이 단어는 많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내 느낌으로는) 좀 격하시키는 표현같다. 즉 ‘네가 네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해도 넌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느낌이다.
물론 ‘여격’으로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그 이유는 그 단어가 그런 식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또한 바로 앞의 ‘부인’이라는 말 때문이다. 이 ’부인’ (ἀπαρνέομαι 아파ㄹ네오마이)의 뜻은 나 자신의 소위 말하는 ‘빽’을 내려 놓는다, 내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박사학위가 몇 개고 외모가 잘생겼고 능력이 얼마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는다 라는 뜻이다. 더불어 자신에 대해 잊고 자신의 관심도 잊는다 라는 뜻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의 열등감이나 과거의 실수 조차도 내려놓는 뜻도 될 수 있다. 위안이 된다.)
별 볼 것 없는 내 인생이지만, 항상 내 안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과연 평범한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풀타임 사역자가 되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것이 현실적인가? 36-37절에는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이지만, 그 귀함을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그 목숨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지 않으면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면 정말 내가 주님을 따르는지 의심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 해답은 내가 주님을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믿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즉 은혜의 문제이다. 베드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하심으로 (마 16:16) 주님을 제대로 고백했다. 물론 아직도 ‘자신을 부인하지 못함’으로 주님께 ‘사탄 (대적하는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주님이 ‘그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확실히 알 때, 그 분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을 때, 나는 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 그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중한 내 목숨의 저렴하고 가치없음도 알게 된다. 주여 나에게 보이소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