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최근 구원파 때문에 곤욕새를 치르고, 더우기 뉴에이지에서는 enlightenment 라고 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른 뜻을 전달하기 때문에 믿는 이들이 꺼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21절에 주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깨달음은 (συνίημι 쑤니에이미 G4920) 라는 단어로 원래는 ‘함께 가져오다’라는 뜻이지만, ‘마음 속에서 서로 연합하다’ 즉 ‘이해하다’ ‘보는 것을 인식하다’ 등의 뜻이다.
예전에는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타고 나는 능력이 노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예체능은 더욱 심하다. 사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지구상에 넘쳐난다. 하나님을 아는 문제도 이와 같아서 인간의 노력이나 이해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첨단 과학 기술 및 물리학의 발달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해 졌지만, 하나님의 어떠함은 그 분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눈 먼자에게 손수 침 뱉어 두 번 안수하시고 그의 눈을 낫게 하신다. 맹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걸 왜 못봐?’라고 답답해 할 필요가 없다. 눈을 고치기 전에는 볼 수 없다.
제자들이 빵 가져 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빵 덩어리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시자 우리 먹을 빵이 있느냐라고 잘못 이해했다.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원어를 보니 우리 번역에는 ‘주의’라는 말이 있지만, 원어에는 그냥 ‘호라테, 블레페테’ 라는 말로 둘 다 ‘보다’라는 뜻이다. ‘보다’를 두 번 말씀하심으로 ‘주의 깊게 보아라’ 는 뜻도 되지만 단순히 ‘보고 또 보아라’는 말도 된다. (물론 ‘아포, from’ 라는 전치사를 두었지만) 아마도 제자들은 주님께서 ‘너희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누룩으로 빵을 만드는지 아니? 헤롯은 또 어떻고? 걔들 정말 맛있게 빵 만들더라’ 라고 오해한 것 같다. 그래서 이미 빵 걱정이 가득한 제자들에게는 누룩 이야기가 빵 이야기로 들렸나보다. 물론 원래는 아람어로 말씀하셨을테니 그것 또한 어떤 식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그걸 보면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잡고 있는 것을 내려 놓고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미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분의 어떠함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보통 ‘말씀’으로 혹은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셨지만, 오늘은 침 뱉고 안수함으로 눈을 고치신다. 새로운,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주님이시다. 오늘 나에게 주님을 알 수 있는 예상을 벗어나는 깨달음의 은혜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