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절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 내 생각에는 이런 일은 제자들을 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리더로서 신비감을 유지할 수도 있고, 이렇게 귀찮고 힘든 일을 왜 하시나. 그런데 역시 내 생각이다. 사랑과 능력의 주님의 생각은 다르다. 그 하찮아 보이는 무리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고하시는 것 같다. 축복하시며. 그러고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특별히 대우하셨지만 무리라고 해서 하찮게 대한 것은 아니다. 모두 사랑하셨다.
46절 그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다. 아,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귀차니즘의 대마왕인 나같으면 그냥 바닷가 경치도 좋겠다, 거기에서 바로 기도할텐데 일부러 산으로 올라가신다. 여기 ‘산’을 뜻하는 헬라어는 ‘오로스’인데, 우리 말 ‘오르다’와 비슷하다. ‘산’ ‘언덕’ ‘동산’ 등에 쓰였다. 제주방언 ‘오름’이 주위보다는 높은 구릉을 뜻하는 것으로 한라산같이 높지 않아도 ‘오름’이다. 아마도 주님도 이런 구릉에 오르지 않으셨나 생각한다. 아무튼 골방에서도 기도하고 교회당에서도 기도하고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구릉에 올라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세상에 항상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렇지 않겠지만 본을 보여 주신 것 같다.
47절 주님이 왜 홀로 뭍에 계셨을까? 가끔 ‘하나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라고 기도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없다…
48절 ‘보시고’의 원어는 ‘에이도’인데 이 단어의 뜻은 ‘보다’ ‘알다’ ‘인식하다’ 등이다. 주님이 시력이 좋으셔서 바다 중간에서 노젓는 제자들을 정말 보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의 고통을 인식하셨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주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보시고 아신다.
밤 사경쯤 –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밤 사경쯤인가? 영어 번역 거의 모두 ‘fourth watch of the night’이라고 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느 번역에 보니 ‘새벽 4시’라고 되어있다. 새벽 네시면 정말 피곤하고 아직도 캄캄한 시간이다. 물론 바람때문에 제자들은 잠을 못자고 있다.
지나가려고 하시매 – 그런데 그 시간에 오셔서 그냥 지나가려고 하신다. 아직도 바람이 불어서 주님의 옷깃은 날리는데 공중에 떠서 걸어 오신다. 그런데 그냥 제자들의 배를 지나가려고 하신다. 아니, 도대체 왜?
49절 시간상 제자들은 피곤해서 자야했지만 바람이 불고 노젓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인데 허공에 떠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본다.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서 ‘헛것 (유령, 팬텀)’을 보는 줄 알고 소리질렀다.
51절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아, 이제야 알겠다. 주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할 수 있게 시련으로 몰아넣으신 거로구나. 바다같은 세상을 힘겹게 노젓고 갈 때 노젓는 뚝심이나 물위에 뜨도록 설계된 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도록 훈련을 시키시는 거다.
52절 제자들은 불과 몇시간 전에 큰 기적을 경험했는데도 주님의 능력을 잊고 ‘그 마음이 둔하여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했던 은혜들도 많지만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가끔 더 신비한 체험을 바랄 때가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이다.
53-56 주님이나 제자들이나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할텐데 곧바로 사역에 임하신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해도 능력의 주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역은 내 건강을 돌아보고 내 체력의 한계 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제자들에게 지난 말씀에서 쉬라고 하셨기에),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더 중요하다.
주님,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을 기억합니다. 내가 고통 당하고 어려웠을 그 때 주님은 사실 나를 업고 가셨다는… 하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그 이상임을 압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이 나를 업고 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내주 하신다는 놀라운 비밀을 다시 한번 알고 깨닫기 원합니다. 내주하시는 주님을 주목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