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절 ‘낱낱이 고하니’ –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제자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들어주셨다.  즉 이러한 자세한 보고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들의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한 기회였다.  선교 보고나 사역 보고가 어떨 때는 대강 넘어갈 때가 있지만, 선교사님들과 교회간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자세하게 보고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많은 경우 기도하려고 할 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무엇을 기도할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 기도하면서  드리는 자세하고 시시콜콜한 말씀은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딸래미가 시시콜콜 하루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지루할 때도 많지만 너무 귀엽다. ㅎㅎ)

34절 ‘큰 무리’ – 이들은 누구인가?  후에 나오지만 남자만 5천 명이 될 정도로 큰 무리인데, 어떻게 몇날 며칠을 주님을 따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일도 없나?  사실 이들은 일자리도 없는 이들, 민중 신학에서 소위 ‘민중’으로 말하는 이들 같다.  같은 기적을 다룬 요한복음 6장 26절에서는 이 무리들에 대해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사실 주님 말씀 때문에 계속 좇아 다닌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주를 좇는 사람들이 아니라, 따라다니면 먹을 거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몰려 다니는 이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이들 (목회자이건 선교사이건 자비량 사역자이건 혹은 평범한 신자이건)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이 이 무리와 같지 않을까?  주님 보다는 생활이 먼저인 많은 기독교인들, 그들 중 나도 있는 것 같다.  말씀이 좋기는 하지만 따라다니다 콩고물이라도 건지면 좋은 것이다.  방글라데시 선교를 가보니 많은 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고 항상 끼니 걱정을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 나도 그들과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36절 ‘사 먹게’ – 제자들은 무리가 돈이 있어 먹을 것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역을 걱정하는 마음에 그냥 그들을 해산시키려고 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다음 절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즉시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계산으로 반응을 보인다.  모든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오늘 예외가 있는데, 그럴만한 능력이 아예 없는 ‘민중’은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공짜로 먹이시는 것이다.

41절 ‘떼어.. 나누고’ – 불우 이웃에게 식량을 전달하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달할 때 ‘덩이’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나누’어야 한다.  고전 11:23 만찬 때 떡을 떼던 것의 원어는 κλάω (Strong G2806) 이라는 단어로 성찬에 쓰인 단어인 반면, 오늘 떡을 ‘뗀’ 단어는 κατακλάω 즉 ‘카타’라는 단어를 추가함으로 ‘잘개 부수다’라는 뜻이 되었다.   ‘나누다’라는 말은 παρατίθημι 라는 단어로 단지 분배만이 아니라 먹기 좋게 앞에 놓은 것을 뜻한다.  즉 제자들도 배가 고프고 피곤했을 것인데 그들은 많은 이들을 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42절 ‘다 배불리 먹고’ – 원어에서는 ‘모두 먹고 만족했다’로 되어 있다.  요 11:35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가 제일 짧은 구절로서 영어로는 Jesus wept.  원어로는 3 단어인데, 이 구절 역시 원어로 5단어로 매우 짧은 구절이다.  원어는 원래 ‘구절’이라는 것이 없지만, 이렇게 짧게 구절로 만들어 놓은 이유는 아마도 확실한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43절 열두 바구니를 거둠 – 더욱 확실하게 증거를 보이는 대목이다.  오병이어를 단지 잘게 부수어 5천으로 나누었다면 배불리 먹을 수도, 열두 바구니 남게 거둘 수도 없다.  위생을 중시하는 서구적 사고방식으로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야했던 것이지만 주님은 먹고 남은 것을 거두어 양을 재신다.  이것이 후에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오병이어를 헌물한 이에게 돌아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후에 말씀을 들으며 배고픈 이들이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희한하게 하나님은 남기는 사역을 하신다.  예산을 세워서 사역을 집행한 후에 발란스가 제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수혜자인 레위지파도 역시 하게 하시며 그것으로 성전 보수나 가난한 자들에게 쓰이게 하신다.

오늘 큐티 적용 질문에 ‘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인가요’ 라고 해서 생각해 본다.  오병이어를 바친 이에게 있어 그것은 당시 자신에게 있던 모든 것이었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바쳤다.  지금 나에게 있어 바칠만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지속적으로 바치는 것이 가능한가?  또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하나님은 지속적인 헌물을 요구하실까?  아니면 오병이어처럼 단 한번의 헌물도 괜찮을까?  필요에 따라 마음이 감동하는대로 믿음으로 하기 원한다.

주님, 오병이어는 이미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쉽지만, 내가 가진 오병이어는 믿음이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원해서 드리게 하소서.  상황과 필요를 볼 수 있게 하시고,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