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가치 혹은 삶의 의미 등을 발견하는 기준 중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는가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삶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이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가고,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분투하는 등 자기 자신의 삶에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믿는 이들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그런 것 보다는 주님을 닮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기에서 만족과 의미를 찾는 것이겠다.
오늘 말씀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려주신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편집인은 굳이 6장 6절까지 포함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의 인정에 항상 목말라 있는 나에게는 이러한 편집이 마음에 좀 걸린다. 그리 많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인정을 구하시지 않고, 당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던 (요 2:24) 주님과는 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있어 '인정' 혹은 '인기'에 전전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46년간 교회를 다녔어도 교회 행정에 대해서 과연 성경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있다. 특히 청빙제도에 대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정말 일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 모셔와야한다면 할 수 없겠지만 교회 내에 충분히 일할 사람이 있음에도 청빙을 한다면, 그 이유는 좀 새로운 사람, 잘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사람을 청빙함으로 서로간에 긴장을 주기 위해서일까? 그러면 오히려 서로 속이는 것이 되지 않을까?
고향으로 오신 주님이 사역을 하려고 하시자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쟤, 마리아의 아들 목수 예수아냐? 어려서 부터 우리 애들이랑 같이 놀던 애 아냐? 지금 식구들도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데 무슨 선지자냐 지가?' 라고 그들에게 있어 전혀 신비롭지 않은 주님을 배척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중고등부 대학 청년부를 거친 사람이 신학교에 가서 같은 교회에서 전도사나 목사가 된다면 사람들은 전혀 신비롭지 않은 그와의 관계에 서먹해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다른 교회로 가서 사역하는 일이 많은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사역하려는 이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하지도 않고 세상직을 가진 '목수'라면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라고 한다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었다. 신학을 하지도 않은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은 문제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신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있는 생각일 수 있다. 더 고민해볼 문제이다.
주님, 은근히 혹은 대놓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저를 볼 때마다 혐오스럽습니다. 저의 약함입니다. 주님께 더욱 의지하고 골방에서 주님을 더 섬기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