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그물도 버리고 (18절) 아비와 일터도 버리고 (19절) 주님을 따랐다. 왜 ‘버렸다’라는 단어를 썼을까? 이 단어는ἀφίημι (아삐에이미, 스트롱 G863) 라는 단어로서, 보내다 버리다 끝장내다 용서하다 떠나다 그만두다 등의 여러 뜻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버린 것을 다시 줍지 않는 다는 확고한 표현같다. 믿는 모든 이들은 제자로 부르심 받았지만 모두가 다 제자로 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주님이 제자가 되려면 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눅 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 14: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제자들은 좀 특별하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소유와 일터와 부모까지 버린 이들이다. 소위 ‘제자 훈련’을 마치고 난 후 소유가 줄었는가? 내 소유가 더 늘었는가? 아니면 더 늘기를 바라는가? ‘무소유’를 외치던 유명한 아무개 스님도 사실은 재산이 엄청 많았다고 하느데 이 시대의 제자는 누구인가?
권위의 문제
22절에서는 주님께서 권위로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들과 같지 않으셨다고 한다. 사실 많이 배우 사람들 일수록 이상하게 권위가 적어지고 오히려 하나만 아는 무식한 사람들이 권위가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이 무식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이유는 많이 배울수록 예외가 의의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 동성욕 등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갖게 되는 지도 모르지만 죄에 대해 성경은 단호하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채워지면 내 발에 등과 내 길에 빛이 되신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권위가 있다.
권위의 문제는 부모에게도 필요한 문제인데, 아이들이 어릴 때는 힘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금새 부쩍 크게되면 더 이상이 힘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권위로 다스려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나무라는 것이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고 그래서 속으로는 끓지만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느낀다. 물론 경험상으로는 실패한 적이 더 많지만... ㅠㅠ
주님의 받으실 증거
주님은 아무에게나 증거 받으실 분이 아니다. 무신론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떠들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해도 하나님에게 그것들은 개가 짖고 귀신이 울부짖는 소음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이 떠나갈 때 그들의 증거를 막으셨다. 귀신 나부랭이의 증거를 무시하셨다. 주님의 사역을 할 때 여러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를 우쭐하게 만드는 칭찬, 나를 힘빠지게 하는 비난, 나를 어지럽게 하는 여러 의견 등등… 하지만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한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를 증거해야 한다. 나의 넉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주님의 영광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주님, 참된 제자로 산다면 분명 말에 권위가 있고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을 압니다. ‘곧’ 버리지 못하고 엉기적 거리는 저의 어떠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