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씌여진지400년이 훨씬 지나서야 이제 ‘때가 찼고 (카이로스가 이루어졌고, 15절)’ 말라기 마지막 구절의 예언과 2절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신약에서 제일 처음 씌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마가 복음이 기록된지 2000년이 지나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롬 11:25) 혹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눅 21:24) 하나님 나라를 위한 회개의 복음은 계속된다.
‘회개’라는 말을 찾아보니 공관복음에는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없다. 공관복음은 주님의 행적을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주님의 어떠함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하나님 나라가 주님 자체이므로 주님이 누구심을 기록한 요한복음에는 회개를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요한 복음에는 생명의 문제를 언급하며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한다.
복음은 죄사함을 위한 세례(침례)가 우선 되지만 죄사함 자체가 목표가 아니고 그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왕국)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 아침부터 찬송가 ‘나 행한 것 죄뿐이니’가 머리속에 맴돌았다. 이 죄 문제는 주님이 해결하신 것이지만 왜 아직도 계속 묶임이 있는지…
4절의 우리 말 번역에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번역에는 ‘죄사함을 위한’ 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 원어는 ‘εἰς’ (스트롱 G1519)으로 ‘을 위하여’ ‘으로’ ‘을 향하여’ 등의 뜻이므로 세례(침례) 자체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걸보면 물로도 씻을 수 없고 불로도 사를 수 없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써 단번에 해결되었다. 주님을 의지한다.
그런데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 15절을 들었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시 로마제국의 압제의 대안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을까? 아니면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받아들였을까? 서른 살의 젊은이가 ‘그 카이로스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바실레이아가 가까이 왔으니 생각을 고쳐먹고 좋은 소식을 믿어라’라는 그 말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오늘 하루 묵상 제목이다.
주님, 상황이 잘되면 기쁘지만 나의 죄나 본모습이 드러나면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