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다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현금 10억을 받고 싶습니까 라는 문구를 보았다. 아마도 대게는 현금 10억 아닐까? 어떤 이들에게는 아마도 10년을 다시 산다는 것은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반면에 현금 10억이 있다면 지금껏 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에게는 현금 10억 보다는 10년을 더 사는 것이 월등히 더 가치가 있다. 10억이 있으면 뭐하나 내일 죽을텐데.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시한부라는 것은 잊고 산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다윗은 왕으로서 살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편하거나 순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라는 찬송이 머리 속에 맴돈다. 내가 받은 복은 무엇일까? 아니, 복이란 무엇일까? 8복을 생각해 본다. 천국을 소유하고, 위로 받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고, 배부르게 되며,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천국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 등에 대한 가치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이런 복을 받는 기준은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온유해야 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청결한 마음을 갖고, 화평하게 하며, 의를 위해 이미 박해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하며, 욕먹고 박해받고 싫은 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항상 재정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십일조에 대한 복은 그래서 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도를 하는 곳도 있다. 어차피 십일조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시험해 보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하는 시도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복을 너무 잘못 이해하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다. 우리가 받은 복은 죄사함과 영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어느 재정적인 축복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거지같은 삶을 영원히 사는 것은 저주이지만, 죄사함 받고 영생이라는 신성한 것을 소유하는 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계속해서 목숨을 이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복은 세어보기도 벅차다.
주님, 측량할 수 없는 영생의 복을 헤아려 보기 원합니다. 다른 것에 눈 돌리는 어리석음에서 떠나게 하시고 주님 주신 복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