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소망이 끊긴 사람이다.  물론 자녀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수 있는 때가 노년이다.  이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만 살 수 있는 황혼의 시기이다. 

어렸을 때 어떤 분이 다른 분에 대해 ‘그 분은 너무 젊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당시는 오해했지만 후에 알고보니 그 사람은 아직도 젊어서 야망이 있고 양보하지 못하는 뜻으로 한 말임을 깨달았다. 

부자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나이 많은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해 볼 필요 없이 본질에 따라 옳은 것을 택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떠오르는 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그는 원칙을 따라 다윗을 섬겼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분명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다음 세대에 교회의 존재 여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혹은 오히려 젊은이들만 모이는 교회들이 이슈화 된다.  하지만 교회는 젊은이들 만의 것이 아니다.  교회에는 많은 성장과 실패, 그리고 실수와 회복을 경험한 나이든 장로들이 있어야 한다.  자신들에 대해 온전히 깨끗하게 이기심과 야망을 내려놓은 이들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그는 사양한다.  결국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 세상에 대해서는 과부, 그리고 영적으로 정결한 처녀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만, 남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는 노인, 그리고 항상 겸손함으로 배우고 순종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한국에는 지역감정이 심하다고 한다.  물론 지역갈등의 문제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은 지역감정을 넘어 이념간의 갈등, 사회계층간의 갈등, 남북갈등, 노소갈등, 노사갈등 등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무색케하는 갈등 들이 존재해서 그 작은 땅에 도무지 공유되고 공감되는 것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는 것이다.  아니 사실 심각하다.  교인들 사이에 전혀 다른 정치색이 존재하고 세계관도 같지 않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은 없는 것 같다.  오늘 말씀 마지막 절에 ‘더 강경하다’는 표현처럼 목소리 높은 쪽이 이기는 것 같다. 

결국 지역감정이나 사람들 사이의 많은 갈등은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갈 것이다.  우리가 노인이 되지 않는다면.  노인처럼 세상과 나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주님, 무언가 내가 해보려고 할 때,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함께 하실 수 없음을 압니다.  오늘 잠잠한 삶, 먼저 뭔가 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인도하심만 열심히 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