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자신을 거스려 반역했던 유다지파에 대해 먼저 손을 내민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는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먼저 화해를 청하시고 무조건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이제는 죄를 지어서 죄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죄사함을 믿지 못한 것이 죄가 된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오늘 출근 길에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찬송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특히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구절이 계속 생각이 났다. 주님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지만 내가 혼자 아무리 주님을 나의 구주며 주인으로 고백해도 만약 주님이 나를 받지 않으신다면 모두 헛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먼저 손 내미시는 주님을 만난다.
전에 부르던 노래 중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라는 가사의 ‘오늘 나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쉬운 것은 먼저 손 내미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 별 다른 방법이나 해결없이 마무리 가사가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라고 끝나는 것이다. 나의 문제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나의 어떠함에 대해 슬퍼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없이 끝난다. 그런데 살다보니 마지막 가사가 결국 해결책임을 알게 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부족함이 있기에 나의 맘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물론 이 노래는 이렇게 끝나지 않고 마음을 맡기고 또 맡기면서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는 간증을 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서운한 일이 생길 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주님의 죄사함을 온전히 받았다면 자연히 먼저 손 내밀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남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사함의 증거가 된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로 고백하는 내용은 오히려 주님이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용서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우리는 먼저 용서받지 않으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용서하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기 원한다. 또 다른 이에게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쓰임받기 원한다.
주님, 먼저 손 내미시는 주님의 그 손을 붙잡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붙잡음으로 나의 손도 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에게, 또 나도 용서를 구할 사람에게 내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