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압살롬이 죽고 그가 구덩이에 던져져서 돌무더기에 묻힌 내용과 함께 그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다.  그 잘생긴 미남 압살롬이지만, 죽고 난 후 그의 몸은 던져지고 버려진다.  참으로 덧없는 인생을 살았다.  살아있었을 때는 왕자의 권세와 많은 사람들로 부터 칭송듣던 외모 등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이제 죽고 나니 그는 버림 받고 제대로 장사되지도 못했다. 

황진이가 죽자 임제라는 사람은 황진이의 묘를 찾아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푸른 풀만이 우거진 골짜기 무덤에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술 잔(盞) 잡아 권할 이(사람)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젊었을 때 그 아름답고 재능많던 황진이도 이제 죽으니 해골밖에 남지 않았다. 인생이란 아무리 멋지게 살아도 무덤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덧없다.  그래서 부활과 영생이 해답이다.

오늘 나의 눈길을 끄는 구절은 18절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는 부분이다.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 그리고 누이를 닮아 아름답고 이름까지 같던 딸 다말이 있었지만, 아마도 그 아들 셋은 다 죽었던 것 같다.  왕이 되면 뭐하랴.  아들이 없는데…  고대 시대는 농업을 주로 하고 전쟁을 해서도 그랬겠지만,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로 여겼었다. 

이 아들이 없는 문제에서 나는 영적 후계자 문제를 본다.  많은 대형 교회들이 후계자 문제를 놓고 많이 시끄럽다.  특히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이들이 많고 이것은 ‘이권’이 걸린 문제여서 교계는 물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세습’은 절대 안된다는 아니지만, ‘세습’이라는 표현이 쓰여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반대다.  고생하는 목회, 하지만 의미있고 보람있는 목회를 자식이 이어받고 자랑스러워한다면 그것은 세습이 아니라 계승하고 본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과 이권이 개입된 상황에서 다른 열심히 일해온 이들을 제치고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식에게 ‘세습’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이미 세운 것이 된다.

개인적으로 비판할 자격이 없을지 몰라도 옥한음 목사님의 가장 큰 실수는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왜 후계자를 밖에서 데려오려 할까?   왜 교회가 세워진지 이미 오래고 내부에도 귀한 일꾼들이 많은데 왜 항상 ‘청빙’하고 밖에서만 데려오려 할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관행이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여러 교단에서는 부목사가 담임목사로 되지 못하게 헌법으로 정한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한 헌법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다행이 ANC는 이미 차세대 담임목사가 세워지고 예배도 많이 인도하고 설교도 자주하는 모습이 참 좋은 것 같다.

후계자 문제는 단지 목회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의 자식들에게 영적인 귀한 것을 전승해야 하며, 혹시 자식이 없다해도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영적인 자식을 낳지 않으면 나의 후계자는 없고 그것은 영적인 저주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복을 받기 원한다.

주님, 우주적인 하나님은 유기적인 교회를 세우심을 믿습니다.  섬기는 후계자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복 주시옵소서.  특히 다음 세대에 복 많이 주시고 다음 세대를 맡은 부모들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