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둘의 차이는 누가 주인인가에 있다.  기도할 때 항상 내가 원하는 뭐를 달라거나 해달라고 하면 종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뜻 안에서 그 뜻을 위해 기도한다.  어제 누가 내 차 옆에 주차를 했는데 내가 다시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바짝 붙여놓았다. (나는 선 안으로 반듯이 주차했다) 그런데 그 안을 보니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 차주가 누구인지도 또 정말로 주님을 믿을는지도 모르지만, 남에 대해 배려가 없는 것을 보면 그는 종교인의 기질이 다분히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차에 십자가를 걸어두는 이유가 십자가 지는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주술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마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구원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내용인데, 나는 그 사건을 며칠 전 나눔에서 이미 다루기도 했지만, 말씀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걸리는 부분이 있다.   3절에 백성들은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라고 했는데, 그들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물론 단순히 ‘왕’이라는 권위에 대해 말한 것일 수도 있고, 다윗이라는 인물을 사모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압살롬의 반역이 다윗의 죄과임을 사람들은 아예 모르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면 이해가 가지만 만약 알고 있었는데도 그를 충성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엘에이 한인 교회 목회자 중 성적인 문제로 목회를 그만 두거나 구설수에 오른 분들이 있다.   목회자가 성적인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어떻게 회개를 해야할까?  그리고 회개란 어떤 것일까?  과연 다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할까?  유명한 아무개 목사는 사건이 터진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목회를 시작해서 빈축을 샀지만, 한번(?)의 성적인 실수(?) 때문에 목회를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리고 그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아마도 카리스마가 있고 성공한(?) 목회자들은 (물론 정치인들 등 권위있는 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함한다) 자신이 다윗이나 모세쯤 되는 줄 생각하나보다.  모세도 여러 처가 있었고 특히 이방여자도 처로 얻었으며, 거기에 대해 비판한 미리암이 저주 받은 일 하며, 오늘 말씀처럼 다윗도 죄의 결과로 이번 일이 발생했지만 백성들은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라고 한 것을 보고, 그런 것에서 용기를 얻은 것일까?  그러한 구약의 경륜을 원한다면 그리스도가 필요없다. 

신약은 말한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딤전 5:2)”  그래서 목회자나 성도나 성적인 것에서 깨끗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특히 목회자들은 자주 여러 여자 성도들을 접하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이 싹틀 수 있다.  이때 마음을 잡고 정신을 차려야한다.  거리를 두면 사무적으로 대한다느니 차갑다느니 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다정하게 대하면 자칫 잘못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아.. 정말 walking on the fine line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남자에게 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답은 없다.  성령 충만 밖에는.

주여, 성령충만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