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여러가지 내용이 있지만 결국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윗의 일행은 압살롬을 피해 요단을 급히 건너 마하나임에 가는 내용이다.  지도를 보면 당시 다윗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고대 지명이나 상황은 확실하지 않아서 추정할 수 밖에 없기는 해도 다윗은 예루살렘 근처 바후림에 있다가 소식을 듣자 황급히 요단을 건너 백성을 이끌고 단숨에 약 40마일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마하나임에 도착하는 것 같다.

구약에서 요단은 보통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역시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홍해를 건너 40년 동안 광야에서 다루심을 받고 요단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  재미있는 것은 애굽에서 해안선을 따라 이스라엘에 오면 금방이고 요단을 건널 필요도 없지만, 남쪽으로 내려가 광야를 뱅뱅 돌며 이스라엘 동편으로 가기 때문에 요단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넌다.  그리고 지금 다윗은 바후림에서 거꾸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강을 건넌다.

또 다른 면은 여호수아서에서 땅을 분배할 때 여러 지역이 요단을 중심으로 분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요단 동쪽에는 어느 지파, 서쪽 남쪽 북쪽에는 어디가 등등 이런 식이다.  이스라엘의 주요한 지파들이 차지한 지역은 사실 요단 서쪽이고 요단 동쪽에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등 별 볼일 없는 지파들 (순전히 내 주관적인 해석. 큐티는 주관적일 수 있으니 ^^ 하지만 이런 내용을 성경에서도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음)이 있는 것 같다.

기독교의 두 가지 큰 의식이 세례(침례)와 성찬인데, 개인적으로 침례를 받으면 정말 새사람이 되어 죄짓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랬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요단을 수십번 수백번 아니 수천번 왔다갔다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동쪽으로 건너면 안식과 평안의 예루살렘이 있는데 실패해서 서쪽으로 건널 때가 많다.  예루살렘에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이 있지만, 요단을 거꾸로 넘으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잃는 것 같다.  아… 정말 곤고한 사람이로다.  다윗에게도 앞 뒤 몇 장으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다윗은 마하나임으로 간다.  물론 비교적 좀 먼거리의 도성이기도 하고 근처 (역사적으로 추정한) 에브라임 수풀이라는 전략적인 장소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왜 그 곳으로 갔을까?  마하나임은 창세기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라며 이름을 지은 곳이고 그 히브리 뜻은 ‘두 개의 캠프’이다.  즉 어떤 임시 거주지이지만 복수로서 강함을 나타내고 또한 두개라는 의미로 ‘증거’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무리일지 모르지만, 경험상 하나님이 나의 죄나 실패로 인해 멀리 느껴질 때 나의 선택은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에서 죄 가운데 방황하는 모습을 택할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힘들지만 그래도 무언가 잡으려고 바둥거리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믿는 사람이 죄나 실수로 인해 아니면 여러 정황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같이 힘든 상황을 맞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나 말씀을 붙들 힘이 없을 수도 있다.  기도 역시 안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마하나임이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믿음의 two camps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공동체가 나에게 진정한 도움으로 올 때는 나의 모든 수치스러움과 어려움이 드러날 때 이다.  내가 숨기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내가 쫓기고 있는 몸임을 알고 드러날 때에, 내가 괴로웁고 고뇌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주여,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나의 선에는 악도 숨어있고, 반대로 나의 실수를 주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실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마하나임으로 가서 싸움을 준비하게 하시며,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기도가 나오지 않아도 주께서 주신 증거를 붙잡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