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사실 성경 안에는 하나님 말씀 아닌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사탄이 한 말도 있고, 욥의 친구들의 우매한 말들도 있으며 이스라엘의 적들이 여호와를 저주했다는 내용까지 있다.  그래서 사실 성경에 있는 내용 중 많은 것들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오늘 큐티에서도 드고아 여인의 말은 마치 후의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이 생각나게 하는 류의 말이지만 본질을 흐리게 하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투의 제안이다.  이방원의 시조가 생각난다.  나의 삶에도 얼마나 흐지부지한 것들이 많았는가?  한국인 문화에도 정확히 맺고 끝는 것이 없을 때가 많고, 잘못을 해도 사과하지 않거나 고마와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냥 '우리 사이에 뭐...' 하며 끝내버린다.

요압은 분명 인간적인 입장에 서서 다윗과 그 아들 압살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한 것이겠지만 결론은 애매모호한 사이가 되버린다.  아… 애매모호한 관계 참 애매모호하다…

과거 복수를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압살롬의 입장과 거기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했을까?  큐티 설명에는 다윗의 이러한 처사가 훗날 압살롬의 반역의 서막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훨씬 전에 암논이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죄(삼하 13:12)를 저질렀을 때 다윗은 ‘심히 노한 것’으로 그쳤다 (삼하 13:21).  암논에 대한 별 다른 처벌이 없었다.  분명 회개하면 용서할 수 있지만 암논은 회개도 없었고 그래서 거기에 따른 용서도 없었고 압살롬이 2년 동안이나 이를 갈고 살인계획을 세우게 한다.  애들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왕도 쉽지 않았던 걸까?  동네 부끄러워 덮었던 걸까?  하지만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구했던 다윗의 모습이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은 모습을 보인다.

나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잘못을 했을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discipline이 있어야 한다.  결과에 따른 책임도 져야한다.  ‘은혜’라는 말로 과오를 덮거나 얼버무리는 것이 참된 은혜의 실천이 아니고, 다 드러내어서 깨끗한 것이 확인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혹 더러운 것이나 잘못된 것이 나와도 거기에 대한 확실한 뉘우침과 하나님의 가정으로서 용서가 있을 때 진정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잘못을 계속 덮다가 썩은 내가 나고 죄가 죄를 낳고, 잘못이 관행이 되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면 하나님은 심판을 시작하신다.

주님, 내 안에 이제 관행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까?  죄나 악을 보아도 혈연관계나 친인척 관계 혹은 교우라는 관계 때문에 내 입을 닫는 것은 있습니까?  주님, 주는 죄인을 듣지 않으시고 악인을 멀리하심을 압니다.  하지만 내가 죄인이며 악인임을 깨닫고 주 앞에 무릎꿇었을 때 주께서 은혜로 임하셨사오니, 뉘우치는 이들에게 은혜로 임하시고 죄과를 도말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비판이나 비난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넘치는 은혜로 discipline할 수 있게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