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유명한 승려가 인간의 욕심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 얘기를 들었다. 즉 반드시 나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형태로 가장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는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을 들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 속에 있는 욕심이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려는 형태로 나오지만 다른 이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도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얘기를 듣고 불교 승려의 이야기지만 나에게도 와 닿았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의 육은 우리 생각 보다 훨씬 강하고 교묘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쁜 형태로도 혹은 좋은 형태로도 나올 수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열심히 자원 봉사를 한다고 하는 것과 오늘 말씀의 암논의 이복동생 강간 사건처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우리 안의 어떤 강한 욕구의 발로 혹은 변환일 수 있다.
예전에도 읽은 말씀이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인간아, 왜 사냐?’ 이다. 다말이 정상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그를 강간한다. 아이구, 못났다… 주위에 자신들은 혹시 몰라도 열심히 무언가 하는 것에 대해 전혀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이들이 보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아이구, 인간아…
그런데, 나 또한 그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도 열심을 내면 말릴 수 없고 주위를 돌아 보지도 않고 전진에 전진할 수 있는 타입이다. 요즘은 많이 좀 변했고, 아마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열심이 식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성적인 것을 포함해서 명예욕 과시욕 물욕 등등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숨어있고, 많은 경우 그것들은 좋은 모습으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아… 인간아…
‘안되면 되게하라’는 70년대 한국의 모토였다. 굶고 사는 현실을 뛰어 넘어야 하니 무리해서 모든 것을 했었다. 그러한 태도가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안되면 주님께 나아가 주를 앙망(기다림)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감히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옆 교회가 막 ‘성장’ 하는데 우리도 같은 행정 같은 프로그램을 빨리 가져다 써야했다. 그리고 국민의 ¼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한다. 아… 인간아…
내일 말씀이지만 암논은 다말을 강간한 후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했다. (15절) 이게 왠일인가? 원하던 것을 얻었으면 좋아해야 할텐데 너무 허무하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 많은 것들을 해도 허무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래서 우리의 선함이나 악함이나 상관없이 모두 주님께 가져가서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 주님의 십자가에서 한번 죽고 새롭게 변화 받아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4:15)
주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내게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 안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 둘은 모두 주님을 떠난 것들이기에 사망에 속한 것들임을 고백합니다. 선한 분은 한 분이시니 곧 하나님 아버지심을 고백합니다. 그 생명을 취하고 그것만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암논같은 저의 어떠함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주 안에서 자유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