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대학교 수업에서 카프카의 A Hunger Artist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물원 같이 우리 안에 ‘단식예술가’라는 사람이 들어가서 단식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는 이야기다. 푯말에 ‘며칠 째굶고 있음’이라고 써 놓고 단식하는 얘기인데, 별 희한한 이야기를 다 썼다고 당시는 궁금해 하다가 결국 ‘먹는 문제’가 사람의 욕구 중 가장 우선이며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나름 이해했다.
성경에는 단식 혹은 금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 큐티 말씀은 다윗의 금식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이가 아파 죽게 되자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낳게 하시기를 기대하고 금식하며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는 죽는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금식할 때에 …』 (마 6:17) 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금식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인 것임을 말씀하신다. 물론 바리새인들의 이레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금식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믿는 이들의 금식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원하는 금식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상 피할 수 없는 금식이다. 그리고 둘 다 영적인 것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9장 1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라고 하시며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즉 환경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오면 자연적인 금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니엘의 경우 자발적으로 금식한 것이 나온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 9:3) 무언가 기도 제목을 놓고 금식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마음이 아프고 환경이 어려워서 목에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하는 금식도 있다. 세월호 사건을 놓고 그 부모들은 물론 이에 대해 애타는 사람들은 밥이 목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자원적이든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든 금식의 목적은 기도하기 위함이다. 다윗도 아픈 자식을 위해 기도하느라 금식했고 어려운 환경에서기도하느라 자연적으로 금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카프카의 단식아티스트의 단식은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화두는 되지만 별 의미없는 단식이다.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금식의 의미를 아는 다윗은 아이가 죽자 금식을 그친다.
이사야 58장에서는 금식에 대해 개인적인 면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보여준다. 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주님은 금식을 하면서 동시에 오락하고 남에게 일시키고 논쟁하고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친다고 답하신다. (3절-4절)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단지 굶는 것이 아니라 그 단식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 즉 하나님의 백성이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이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백성들의 고통이며 불의며 태만이고 그러한 것들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오히려 금식임을 말씀한다. 한국의 양극화가 생각나고 북한 백성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고통 등이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중에 하나로 생각되는 것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이다. 즉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어떠한 것인데, 이것이 무엇이지 몇십년을 이 문제를 놓고 계속 씨름 중이다. 아는 것 같으면서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것이다. 물론 쉽게 생각해서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몇 십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 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자신에만 국한된다면 별 다른 고민이 필요없는데,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성경 말씀은 나만을 위해서만 씌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고민까지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하지만 경험상 하나 배운 것이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면 그 역시 ‘내가’ 하는 것이라서 결국은 실패하며, 말씀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즉 ‘내게’여야 하고 또 이것은 ‘영적인’ 무엇이며, 이 영적인 것은 나의 육이 아니라 영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가능하며,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금식이라는 것이다. 금식을 시작하면 내가 무언가 하려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하는 것들이 멈춰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도가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가끔 어떤 사람은 금식조차 자신의 강철같은 의지로 하는데 정말 못말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금식으로 겸손을 배우고 영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과 육적인 면이 더 강해진다.) 목회자들을 잘 접대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목회자들에게 금식 혹은 소식하는 기회를 빼앗는다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목회자들만이 아닌 믿는 모든 이들에 해당하지만…
주여~~~~~ 주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