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편은 ‘정한 마음 창조하소서’라는 찬양 가사의 원문으로 그 앞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다윗은 이 노래를 오늘 큐티 말씀인 나단이 와서 그에게 죄를 깨닫게 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이다.

구절구절마다 너무 은혜가 되는데  유독 4절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린다.  주께만 범죄했다면 그 불쌍한 우리아와 또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밧세바는?  다윗은 그들에게는 범죄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도 남에게 피해를 입혀놓고 하나님 앞에만 가서 용서를 구하면 되는가?  영화 밀양은 그러한 내용으로 기독교의 죄와 용서의 개념에 대해 일격을 가한다.  아닌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보면 죄와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는 밀양의 유괴범의 해석이 그리 틀리진 않았다.

우선 다윗이 ‘주께만’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죄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하다.  전에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이 세상에서 죄라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결과는 소름끼치게도 없었다.  살인도 간음도 외도도 사기도 그 어떤 것도 죄가 아니다.  남에게 피해주고 히틀러 처럼 수 많은 사람들을 죽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죄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자기 기준대로 힘있는 자가 하는 것이 법이요 선이다.  물론 양심으로 죄를 깨닫기도 하지만, ‘양심이 화인 맞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말씀한다.  그렇기에 우선 ‘죄’는 인간들의 관계를 떠나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주께만’에 해당한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주를 대적하여 (against God)’ 짓는다.  그래서 죄를 짓는 대상도 ‘주께만’이고 또한 용서의 첫번째 단계 역시 하나님이시다. 

두번째 이유는 다윗의 위치이다.  그는 왕이다.  왕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처와 첩을 마음대로 둘 수 있었고 남의 처까지 빼앗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에게 그러한 권력이 주어졌다.  이것을 잘못해석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현대적 사고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튼 그는 왕으로서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면죄부가 있었다.  그래서 ‘주께만’이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나단이 와서 예를 든 양의 비유에 있다.  그 비유는 다윗이 행한 것에 대해 현대적 이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다윗의 문제는 양 한마리의 문제가 아니라 충신을 살해하고 유부녀를 강탈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단은 직설적인 설명보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한다.  다윗은 듣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고 나단은 즉시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하며 그의 죄가 즉시 사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이 주어진다.  신약시대에는 ‘벌’은 주님께서 다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도 같은 내용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용서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룬다.  17장 3절에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바탕은 ‘무조건’이 아니라 ‘회개하거든’ 용서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용서하고 싶어도 본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본인이 회개도 하지 않았는데 용서를 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 주님은 한번 더 말씀하신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즉 진심으로 ‘회개하면’ 수없이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지만, 동시에 죄를 지은 사람이 연약해서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그 가운데 죄에 대한 아픔과 원통함이 있어서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용서의 기회를 얻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죄나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험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정말 믿는 자인가, 나에게 믿음이 있나, 내 안에 생명이 있나 하고 의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주께만 범죄’했다는 다윗의 고백으로 우선 주님께 나아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다시 밀양의 얘기로 돌아가서, 그 유괴범은 ‘주께만 범죄한’ 것에 대해서는 잘 이해했다.  하지만 그가 다윗은 아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고 또 불신자도 아니다.  신자의 바른 믿음과 죄사함에 대한 태도는 ‘왕’으로서가 아니고 ‘죄인’으로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죄를 고한다’(약 5:16).

그런데 우리끼리 서로 죄를 고백해도 하나님에 대해 바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만의 행사로 끝난다.  이것이 세상의 용서와 믿음의 용서의 차이다.  세상에서 오해나 편견으로 인해 죄를 뒤집어 쓰거나 혹은 주님께 순종하느라 실정법을 어긴 경우라면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실정법을 초월한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뉘우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용서는 관계회복이 목적이다.  용서 자체도 가치가 있지만 용서한 것으로만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다.  교제가 필요없다면 용서 역시 필요없다.  그냥 보지 않고 살면 된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은 우리가 단지 죄책감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음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성도간의 참된 교제로 부르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용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사실 '무조건'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용서를 받으려면 와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주님, 시편 51편은 나의 노래입니다.  다만 주의 성령은 저를 떠나시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계속 실수하는 제 자신을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시고, 먼저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하시고, 주님과 서로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연약함과 실수를 용납하게 하소서.  주 앞에서 나의 감춰진 은밀한 죄가 있는지 비춰주시고,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취하게 하시며, 뉘우칠 것은 뉘우치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