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전쟁에서 싸울 때 마다 하나님께 아뢰었지만 성전 건축에 대해서는 선지자 나단을 부른다. 이것을 보면 성전 건축이라는 것이 전쟁보다 훨씬 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전쟁 혹은 전투는 빠른 경우 한나절이면 끝나지만 성전 건축은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는 문제고,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생각해야하며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갈 수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집은 화려한 백향목 궁이지만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텐트에 있다고 말하며 성전 건축의 뜻을 내비치는데 나단은 그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후손이 성전을 짓고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것은, 기도할 때나 말할 때 교회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식한 소리고 이단적이며 하나님도 열받으시게 하는 소리다. 성전은 이 지구 상에 단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치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루살렘 뿐이다. 예루살렘성 밖에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것이다. 이단 이단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이단이다. 그러니 그렇게 돈을 쳐들여서 화려한 건물을 짓고 그 건물을 숭배하게 되지… (물론 건물이 필요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14절에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아들로 칭하셨을 때는 별로 찾아볼 수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 찾아보았는데 솔로몬에게도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셨던 적은 없던 것 같다. (혹시 아시는 분?) 그래서 오늘 큐티 해석을 보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고, 거기에 대해 유대인들은 성전이 46년 동안 지었는데 어떻게 3일 만에 일으키겠느냐 라고 물었고 (20절), 요한은 그 성전이 바로 주님의 몸을 가리켰음을 밝힌다 (21절).
주님의 몸이 성전이고,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도’된 우리도 성전이 된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물론 ‘너희 몸’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라고 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해석으로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성전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것이기에 우리의 몸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우리의 몸은 타락한 그대로면 육신으로 끝나서 썩게 되지만,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거룩하게 지키면 그 날 썩을 몸도 변화하여 영원한 몸으로 갈아입게 된다. (고전 15:53)
그런데 사실 오늘 우리를 위한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23)” 위의 고린도 전서 3:16절에서 ‘너희는’ 이라는 복수를 사용했기 때문에 (물론 각 사람이 주님을 믿어 성령이 거함으로 각 사람이 성전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겠지만) 성전은 우리가 모일 때 교회로 실현된다. 교회는 ‘너희(우리)’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전이다. 그리고 그 몸은 하나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4)”
주님, 주님은 각 사람의 영에도 거하시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주님의 몸으로서 성전이 됨을 믿습니다. 이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며 사랑하게 하소서. 더 이상 건물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있는 유기적인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게 하소서. 오늘 나를 지탱해주는 살아있는 벽돌인 신앙의 선배들을 보게 하시고, 나 역시 다른 이들의 무게를 견디는 살아있는 벽돌로 살게 하소서. 하나 하나 싸여 지어지고 완성되는 귀한 비전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