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시는 우리말 시처럼 rhyme이 없다고 한다. 즉 시편에 나오는 시들이나 욥기, 여러 선지서들 가운데의 시들, 그리고 오늘 큐티 본문의 다윗의 애가도 rhyme이 없다. 영어 찬송이나 시 그리고 CCM을 들으면서 항상 감탄하는 것은 그 rhyme에 있는데, 히브리 시에서는 라임이 없다. 우리 말 역시 너무 조사(助詞)가 많고 단어들이 끝나는 형태가 다양하지 않아서 라임은 쉽지 않다. 지난 몇년 사이로 가요계에서는 한국 노래에도 라임을 도입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 시들은 언뜻 보기에 산문에 가깝다. 히브리 시들이 시가 될 수 있어 보이는 것은 문장들이 주거니 받거니 (이걸 뭐라고 표현하는지 잊었지만) 비교와 대조하는 것이 있어서 시가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문장에 하늘에 대해 말하면 그 다음 문장에는 바다가 나오는 식이다. 물론 노래를 불러야하기 때문에 각 문장의 길이는 비슷해야 한다.
아무튼 오늘 다윗의 애가도 언뜻보면 시같아 보이지 않고 산문에 가깝다. 당시의 최고 시인인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이 애가를 지었는데 그 둘의 죽음 특히 사울의 죽음이 비참했음에도 애가의 내용에는 그런 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만을 그린다. 사망 앞에서 인간은 가장 무기력하고 무의미함을 맛보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사랑’ ‘아름다움’ ‘독수리’ ‘사자’ 등의 단어를 써가며 그들을 칭송함으로 절망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언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같다.
왜 칼의 노래라 하지 않고 활 노래라고 했을까? 고대 무기에는 칼도 있고 활 창 물매 등도 있는데 활을 굳이 쓴것을 보면 사울보다는 요나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애가를 잘 보면 죽음에 대한 언급이 9번 이상 나오는데 처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끝도 역시 사망에 대해 외치며 끝난다. 우리 삶 속에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성공 실패 모두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은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세월호의 어리고 순진한 학생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잊고 살면 안되기에 애가를 짓고 또 부른다. 그 애가를 부를 때 애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애가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시편 39편 4-7을 오늘의 기도로…
(시 39: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시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 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