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만나 얘기하다가 전라도 사람이 ‘여차여차는 거시기여’라고 했다. 그러자 ‘거시기’가 뭔지 모르는 경상도 사람이 ‘거시가가 모꼬?’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라도 사람이 ‘모꼬가 무시기?’라고 되물었다. 결국 둘은 싸웠다고 한다. ㅎㅎ
고등학교 때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어떻게 하면 맺을까 고민하다가 매일 한 열매씩 연습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에 월요일부터 매일 하나씩 그리고 주일에는 3개씩 연습하자 라고 결심했다. 결론적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나는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절제’라는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니 오히려 더 절제하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상당히 유교적인 발상이었고, 또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교만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성령의 열매를 연습으로 맺을 수 있다해도 그것은 위선이고 그 열매는 모양은 있지만 맛고 향은 없고 속이 빈 열매와 같다. 우리의 노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다.
성령의 열매(단수)는 하나님이신 성령만이 맺으실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나무는 자연적으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으신다. 이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 ‘아가파오’는 그리스 플라톤 당시 초기 문학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금 나오다가 나중에는 없어진 단어이다. 그 후에는 신약에서만 사용된다. 그래서 당시 문학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일반인들에게는 ‘거시기’와 같던 단어이다. 물론 ‘거시기’는 아무때나 어느 것에도 쓸 수 있는 말임에 비해 ‘아가파오’는 거룩한 단어이기에 올바른 비교는 아니지만, 당시 믿는 이들에게는 이 ‘아가파오’라는 단어가 자연히 ‘하나님’을 떠올리게 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고 이 열매는 8가지 모양과 맛과 향과 색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오시면 상황이 어찌되었건 자연히 ‘기쁘게 (희락)’된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내게 담대함을 주고 나와 내 이웃에게 화평을 허락한다. 오~~~래 참을 수 있게되고 자비로운 삶, 착한 삶, 충성된 삶, 가난하지만 부드러운 삶, 그리고 절제라는 승리를 맛본다.
이런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16절) 행할 때 나타나는 열매다. ‘사랑장’인 고전 13장 바로 다음 14장 1절에는 ‘사랑을 추구하라’ 혹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라고 말씀한다. 즉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따라 행할 때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볼 때, ‘와,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렇게 살 수가 있었지?’라고 감탄하고 궁금하게 만든다. 그렇다. 인간으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셨다. 내가 하려면 위선이라는 열매밖에 맺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고 내 삶속에서 8가지 모양의 맛과 색과 향이 나와 나를 8방미인으로 만드신다. ㅎㅎ
* 아가페(원형 아가파오 strong G25)라는 단어는 딤후 4:10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라는 구절에서도 쓰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 것 같은 ‘그 사랑’이 아니라 데마가 이 세상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좇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1요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에서도 아가파오를 쓰고 있다. 원래 아가파오라는 단어는 ‘먹을 것을 주고 만족케 하는’ 뜻이 있었다. 즉 ‘만족’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우리가 세상으로 만족하려는지 아니면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지도 어떤 열매를 맺는지에 영향을 준다.
주님, 내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보다 육체의 일이 더 많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행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