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쓴지 며칠 지났지만 올리지 않았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별 관계도 없는 내가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데, 유족이나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잠도 설치고 금식도 해보았다.  그런데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그리 구조에 늑장을 부리는가이다.  마치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리는듯 구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멀리서 뉴스만 보는 사람들과는 입장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정부의 태도는 나를 너무 실망하게 한다.  구원파가 관계있다고 하는데 마치 정계에 구원파의 입김이 든 것 마냥 의혹 투성이다. (오늘 4/28/2014 기사로는8000만원을 추가이익을 보기 위해 적재량을 2천톤이나 넘기고 물이 들어가야할 통에 공기를 집어 넣어 균형을 상실하게 한 것이 주범인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은 돈이구나.)

인터넷에는 노란 리본이 돌아다니고 있고 그것에 대해 또 루머가 돌고 있는데, 노란 리본에 있는 다수의 메시지는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이다.  물론 좋은 바람이고 나 역시 그렇게 되면 좋겠다.  하지만 침몰후 시간이 이제 많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생존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예로 보면 사건 꽤 오랜 기간 후에도 생존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그 당시 생존자는 적어도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있었고, 빗물이라도 받아 먹을 수 있었지만, 세월호의 상황은 그런 것이 전혀 허락되지 않고 특히 몸이 물에 빠져있는한 저체온증으로 두어시간이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즉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기적은 이제 바라기 힘들다는 것이다.  혹시 에어포켓이 있어도 생존자들이 이제까지 버틸 수 있을만한 양의 산소는 없을 것 같다.  대게 모두 익사하거나 저체온증 혹은 산소부족 등으로 질식사했을 것이다. 

우리도 죽음

그런데 이번 일에 한국 국민들은 물론 해외의 한인들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정작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사건을 바로보고 있는 우리 모두 역시 언젠가는 한번 죽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상황만 다를 뿐이고 주어진 시간만 다를 뿐이지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장례식에 여러번 참석했지만 그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누워있는 모습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은 흘리지만 정작 자신이 언젠가 죽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은 눈물을 흘렸다.  주위 사람들은 나사로가 불쌍해서, 그의 죽음이 슬퍼서 우셨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모든 인류가 당면한 궁극적인 문제인 사망의 문제에 대해 주님은 눈물을 흘리신 것이라 생각한다.  즉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슬퍼하느냐?  너희도 언젠간 죽지 않겠느냐?  그것이 슬프지 않느냐?’  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는 말씀도 생각난다.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닥칠 환란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 사실을 잊고는 살지만 언제가 죽는 다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 시각을 정리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1. 죽으면 모든게 끝난다는 생각 – 많은 사람들, 특히 비종교인들 혹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 조차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
  2. 죽으면 ‘다음 생’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계속 윤회한다는 시각
  3. 죽으면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착한 사람은 천당가고 못된 사람은 지옥 간다는 시각
  4. 죽으면 심판이 있고 ‘믿음에 의한 구원’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 혹은 죽음과 형벌이 있다는 시각
  5. 그 외 별 희한한 생각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는데, 죽음도 그렇거니와 당사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 죽음 앞의 두려움 등을 생각해본다.  왜 죽음이 두려울까?  죽는 고통이 있어서?  가족들이나 친지를 다시 보지 못해서?  너무 어려서 죽는 것이 분해서?

하지만 죽음 앞에 정작 서게되면 죽음에 대한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른 태도와 해석이 나올 것이다.  1번의 시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죽으면 그만이니까.  물론 당시의 고통과 두려움은 있을지라도 죽으면 다 끝나고 없어지니 잠시 동안만 슬픔과 고통 혹은 그리움을 참으면 된다.  2번의 시각으로는 더욱 문제가 없다.  죽어도 어차피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니까.  특히 어려서 죽었으면 동물로 환생할리도 없을 것 아닌가?  여기도 물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다는 아픔과 슬픔은 있다할지라도 이런 시각이 확실이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3번의 시각으로도 별 문제가 없다.  어차피 착한 사람은 천당가고 못된 사람은 지옥 간다면 이번에 죽은 아이들이 혹시라도 지옥에 가기나 하겠는가?  그 많은 생명을 생매장한 선장이면 몰라도.  5번은 거론할 가치도 없으니 패스.  이제 남은 건 기독교의 시각인 4번이다.  즉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이들은 ‘천국 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영벌이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몸의 부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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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제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적 죽음에 대한 시각에는 불신자들 입장에서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않으면 착하거나 어리거나 관계없이 모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일까?  성경이 과연 그렇게 가르치고 있나?  예를 들어 낙태된 아이들은 그러면 모두 지옥에 가야하나?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죽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지옥가나?  아니면 평생 예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모두 지옥가는가?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실 것인가?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그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해야하고 선교해야 한다고.  그런데 ‘천당에 가는 것’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구원’인가?  그러면서 왜 주기도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는가?  왜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 오는 개념이 성경에는 많은가?  구원을 ‘천당 가는 것’으로 단순화 한 것이 큰 문제이다.  구원은 지옥신세 면하고 천당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시각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다.

이런 시각이니 이번에 연류된 불신자 유족들은 기독교적 시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의 자녀들은 모두 지금 ‘지옥’에서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죽어서 가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개념에는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좀 옆에 밀어놓고, 과연 구원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할 것 같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하면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말한다.  즉 죄에 대한 구속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에 대한 힌트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외우고 사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지옥가지 않고 천당가게 하려 하심이라”로 바꿔 이해한다.  지옥이 아니라 ‘멸망하지 않고’이다.  이 ‘멸망’에 쓰여진 헬라어ἀπόλλυμι라는 단어는 ‘끝내다’ ‘죽이다’ ‘쓸모없게 되다’ 파괴되다’ 등의 뜻이고, 음식이 상해서 못쓰고 부패되어 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운 단어이다.  또 연달아 말씀하는 것은 ‘천당’이 아니라 ‘영원하신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온전한 구원이라고 한다.  물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얘기에 음부와 낙원도 있고 궁극적으로 불못과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나뉘는 것은 결국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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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얘기를 바꿔서, 불신자들은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이런 사건이 터지면 하나님 운운하는가?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는 둥…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인재였다.  그런데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하나님이 있다면 그 어린 것들을 위해 중간에 기적을 일으키거나 개입을 하지 않았는가 비판한다.  이상하다.  신도 믿지 않는데 왜 신 운운하는가?  신을 믿지 않는 그대들이여, 인재가 다시 생기지 않게 하라.  그러면 된다.

또 다른면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도 역시 신에 대해 불평이다.  그런데 그렇게 불평할 수 있을 정도로 신께 충성하고 봉사했나?  정말 신께 불평하려면 욥처럼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분 중심으로 살아야한다.  그렇게 해도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기면 혹시 신을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한 날 한 시에 고통에 처한 욥은 신에 대해 원망의 말을 일절하지 않았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니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다윗이 그 아들이 병 들었을 때의 태도를 조심스레 가져본다.  아들이 아프니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결국 죽으니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음식을 먹었다.  물론 네 일이 아니니 그렇게 쉽게 기적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기적을 바랄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면 기적은 신께서 베푸는 것이고, 기적을 구하다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은 그쳐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이번 일을 통해 시한부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회개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난리를 피우지만, 그대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시한부 인생임을 왜 모르는가?  앞으로 50년 60년 살 시간이 남아있다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것이다.

어쟀거나 유족들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성경의 과정은 창조에서 사람의 타락과 창세전에 죽임당하신 어린양, 그리고 율법, 신약의 교회의 등장과 건축, 그리고 계시록의 사내아이, 그리고 마지막의 결론은 신랑이신 주님과 성령과 신부 정로도 요약될 수 있다.  즉 지금은 교회 시대이고, 교회들을 통해 사내아이가 등장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천당과 지옥’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믿지 않아도 열방은 남아있다.  그래서 초기 성경을 편집할 때 요한계시록을 넣는 문제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왜 분명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데 주를 믿지도 않는 ‘만국’ 즉 이방인들이 아직도 성밖에 살아남아있고 믿는 이들은 그들에 대해 왕노릇하는가?  만약 이방인들이 살아남은 이유가 주님을 믿은 것이었다면 왜 성안에 있지 성밖에 있어서 계속 ‘소성(치유)’를 받아야 할까?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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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대하여

각주1(음부): 음부는 구약의 스올(창37:35, 시6:5)과 같은 곳으로서, 죽은 사람들의 혼과 영이 보존되는 곳이다(눅16:22-23, 행2:27).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1:18).

 

각주2(음부) :사람의 타락과 죄 때문에 죽음이 이 땅에 들어와, 지금은 이 땅 위에서 일하면서 죄 있는 모든 사람을 음부(陰府)에 모으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모으는 것이고, 음부는 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음부를 주관하는 열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구주의 손 안에 있다.

다윗이나 야곱이 음부에 간다는 기록(창42:38, 시30:3)으로 이들이 지옥가느냐고 공격하는 일은  회복역의 바른 번역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맙니다.

…이 둘(짐승, 거짓 신언자)은 유황으로 불타는 불 못에 산 채로 던져졌고(계19:20).

 

각주1(던져졌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첫 번째로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비교 20:10, 15). 그들은 멸망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과 부활을 거치지 않고 산 채로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후략)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짐승과 거짓 신언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계20:10).

 

각주1(불과 유황의 못): 불과 유황의 못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게 예비된 것이다(마25:41). 그러나 짐승과 거짓 신언자와 마태복음 25장 32, 33, 41절에 있는 ‘염소들’은 마귀보다 천 년 더 일찍 불 못에 던져진다(계19:20).천 년이 지난 후에는 마귀도 역시 그곳에 던져진다.

 

죽음과 음부[3]도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둘째 죽음, 곧 불 못입니다(계20:14).

사탄, 짐승, 거짓 신언자, 죽음, 음부, 염소들, 쭉정이, 가라지, 생명책에 기록이 없는 불신자들이 던져질 일종의 우주적인 쓰레기통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주님을 믿어 영접하고, 변화받고,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장차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불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을 것인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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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궁금해서 질문을 했었다.  만약 부모님이 믿지 않고 돌아가셔서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 받는다면 그런 부모를 둔 자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더니 목사님께서는 만약 그런 부모에게 그 자식들이 가서 부모님들이 그렇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니 나도 예수를 안믿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래라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대답은 나에게 당시 깨달음을 주었다.  아, 그렇다.  부모가 예수 믿지 않아서 지옥갔다해도 자식들에게 ‘너희도 믿지 말고 지옥에 와라’고 말할 부모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런 시각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우리 나라 조선 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지옥에 가야할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예수 믿지 않아도 지옥가지 않을 수 있으니 예수 믿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 반대로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반드시 지옥가니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니 그런 가르침이 있는 기독교는 믿지 않겠다 라는 생각 역시 마귀가 주는 생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