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목사분들 중에 다른 이를 ‘내 제자’라고 소개하실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좀 거북한 기분이다. ‘제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이기에, 다른 이를 자신의 제자로 소개하면 특히 목회자로서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특히 목사이면서 교수분들이 그런 말을 잘 한다. 아닌게 아니라 학문적으로는 제자로 소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인' 당사자를 존경하는 의미도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교수로서만이 아닌 목사로서 그런 말을 할때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뭔가 좀 더 어울리는 단어가 없을까? 아무튼 ‘제자를 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바울의 입장은 좀 특이하다. 결코 교만하지 않은 그이지만 성경 여러곳에서 자신을 본받으라는 둥, 너희를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는 둥, 내가 너희를 낳았다는 둥,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는 둥 자칫 들으면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오늘 말씀 14절은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말도 한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과 교인들 사이의 중보로 놓으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바울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그와 같이 자비량으로 목회를 해야하고 또 그가 겪은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 내야한다. 그래야 비로서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쓴 편지 조차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있다. 감옥에 갇힌 것을 본받으라고?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왜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 대신 바울을 본받아야 할까? ‘해산의 수고’에 답이있다. 거짓복음이 들어와도 분변치 못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은 아직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또 다시 해산의 수고로 그들을 가르치고 먹이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해산의 수고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의 진짜 목적은 성도들의 유일한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다.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본받을만해도 결국 바울 자신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목점임을 분명히 한다(19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바울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어린 아이같은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해산의 수고를 감내할 수 있었다.
이번 주 내내 8개월된 애기 사람이 같이 살게 되어 집안이 어수선하다. 조그만 녀석 하나가 늘었다고 사는 패턴이 달라진다. 별로 하는 것 없는데도 피곤하다. 다섯식구 모두가 이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준다. 해산의 수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아기 하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몇년 만에 다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바울은 영적으로 어린 심령 하나 하나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사랑이 가득한 태도로 그들을 대한다.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그들 또한 바울을 사랑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이간시키는 악한 이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열심이게 하는 것에 비해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을 위해 열심인 자신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역의 기준이었고, 각 형제 안에서 그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열심을 낼 수 있었다 (18절). 더우기 언성을 높이기까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20절). 주여, 이런 사랑과 열심을 나도 갖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이 나의 목적이 되어 쉬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힘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