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이들은 그 받은 바 거듭난 생명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장하여 아들이 되지만, 사역면에서는 또한 하나님의 종이다. 오늘 갈라디아서 4:7절에서 우리가 종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에 아들의 명분 곧 sonship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양자'로 번역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양자 즉 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으로 그 안에서 거듭났기 때문에 동시에 본질적인 면에서도 아들이 된다. 그래서 sonship은 '양자'보다는 '아들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그 이유는 우리 한국 문화에서 아직도 '양자'나 '입양'에 대한 인식이 외국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고, '혈통'을 중시하는 생각이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헬라어의 이 sonship은 '입양'의 뜻이 분명 맞지만, 그 당시 '입양'은 온전히 자녀로 인정된 것에 비해, 우리의 문화에서는 아직도 '남의 자식'이라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입양됨으로 '남의 자식'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본질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완전히 바뀌었다.
재미있는 것은 7절에서 갑자기 '네가'로 단수로 바뀌었다. 다른 구절들은 모두 '너희' 복수이고, 헬라어도 역시 단수 복수를 구분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같은 구절 '상속자'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역사를 통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지만, '상속'이라는 개념에 의하면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그 모든 어떠하심을 동일하게 유업으로 받게 되는 은혜를 입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나눠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 한량없으신 유업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 같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자녀가 많으면 재산이 나누어지지만,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부요하심은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자녀들에게 나누어도 그 부요함이 줄어들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아들의 명분을 입은 우리들이 구약의 모든 율례에 따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안식일, 여러 절기들, 안식년, 희년 등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지켜져왔던 것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고 오히려 다시 '종노릇'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열매나 2장 20절 말씀같이 많이 회자되는 구절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의 말씀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을 정도로 자유로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종교성은 우리를 계속 '종의 위치'로 남기를 원한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 종의 위치가 아니라, 사역면에서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길 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 아들의 명분으로 오늘을 살며,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