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보면 왜 당시 최고의 정치와 문화를 이끌던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그렇게 많이 설명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또 오늘 갈라디아서 역시 왜 이방인들에게 율법이야기를 그리도 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물론 가만히 들어온 이들 (2:4) 때문이기도 하지만, 율법의 그 종교적 매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은 분명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유대인만을 위한 특별한 것이었지만, 그 종교적 성격과 매력은 이방인들도 따라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육체의 열심과 능력과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세상의 주요 종교인들의 행복도를 설문한 결과 기독교인들의 행복도가 가장 낮고 불교가 가장 높았다는 조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철저히 자신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에, 특히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는 철저히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종교의 유일한 목적이 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사실 율법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제일 우선시 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약의 새계명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이기에 해보다 해보다 안되고 좌절하고, 그러다 그냥 마지못해 종교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비교적 행복도가 낮을 수 밖에 없다. 즉 기독교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와 은혜를 누기리 보다는 ‘종교생활’을 지향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오늘 말씀에 율법의 헛점은 지키는 자들이 ‘모든 항목’을 ‘항상’ 지켜야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3절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말씀인데, 신명기 6장 25절 역시 비슷한 말씀이 있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율법의 기능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래서 율법과 상관없는 우리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복을 누린다. (14절)
주님,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분명 멋진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멋진 것임을 알게 하소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고, 나의 노력이나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는 헛된 노력을 그치게 하소서. 이미 이루신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소서. 나는 자격없고 더럽지만, 주께서 나를 받으심을 믿습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아멘…